한국 힙합에 대한 불만에 대한 불만

의외로 힙합을 자주 듣습니다. 물론 제가 좋아하는 건 재즈 힙합이나 클라우드 랩 계열입니다. 트랩이나 그라임이나 그런 건 좋고 나쁨을 평가하기 이전에 제 귀가 견디지 못하는 편입니다. 풍경에 어울리는 음악을 듣는다고 했지요. 소도시 풍경은 네온사인도 없을 정도로 한적하기 때문에, 강렬한 트랩 씩이나 듣고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좀처럼 '리스너 그룹'과 어울리질 못해서, 그 안에서 힙합 음반을 두고 어떤 평가가 이루어지는지 잘 알진 못합니다. 그래도 어림짐작은 가능합니다. 주로 해외 래퍼들 음반을 좋아하겠지요. 제가 그랬으니까요. 해외 래퍼들 가사까지 번역을 해가며 다 듣다가, 할 거 없는 사람들이 끝에 가서 한국 힙합을 들'었'을 겁니다. 더 옛날 '한국 힙합'이 없던 시절엔, '왜 없어? 그럼 내가 만들어야지.' 하는 사람들이 있었겠죠.

소설에서나 음악에서나 장르가 이식되는 과정은 늘 비슷했습니다. 무협이나 판타지 소설이 그렇습니다. 하이텔 등지에서 중국 무협 소설을 다 읽고 할 거 없는 사람들이 무협을 쓰기 시작한 것이라 들었고, 이영도 같은 경우에도 <반지의 제왕>이나 <로도스도 전기>니 하는 걸 구해 보다가 도저히 못 참겠다 싶어서 <드래곤 라자>를 쓰기 시작했을 겁니다. 그러니 '한국 장르'란 마이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식된 것인데다, 좋아서 하는 건데, '정말 먹을 게 없어서' 하는 것에 가깝거든요. 하는 사람들도 한줌단이라 이걸로 먹고 사는 것? 포기한 다음에야 가능합니다.

그 점에서 '한국 힙합'은 까내려지기 바쁩니다. 우선적으로 '토양이 맞지 않다'는 게 주된 비판점입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영혼을 한국인이 담아낼 수 있느냐'는 것이나, '그냥 길에서 담배피고 삥뜯는 일진 주제에 폼 잡는다'던가, 그리고 제 주변에서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것은 '사회적 약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폼을 잡는다'는 것입니다. 저도 주변에서 '한국 힙합'을 권유받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피타입'이란 래퍼가 자기 노래에서도 자학적으로 말했죠. <폭력적인 잡종문화>라고 불린다고.

근데, 기왕 제가 좋아하는 피타입 선생님 음악을 인용했으니까, 한 마디만 더 인용해봅시다. “경찰에게 총 맞는 친구는 없어도 / 억울하게 죽은 아이들은 많아 이렇게만 써도 / 무슨 애긴지 안단 게 슬픈 거야 / 한 단계 추락했지, 모두의 삶이 위험한 단계” 네, 미국 아프리카계 민족에게 있어서의 허슬(Hustle)은 한국 사람들이 하는 허슬과 다를 겁니다. 그러나 비교할 필요도 없이 모두 '고생'이라는 공통점이 있죠. '힙합'이라는 건 그런 '고생'을 이겨나가기 위한 '센 척'입니다. 불쾌할 수 있죠. 그런데 정말로, 정말로 '이 래퍼 좀 치는데?'싶은 래퍼들의 가사들을 들여다보면 읽어낼 수 있는 게 많습니다.

아, 한 가지 더. 확실하게 성소수자나 여성 등 약자를 비방함으로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래퍼가 존재하는 것은 맞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래퍼가 한국 힙합의 '전부'라기에는, 글쎄요. 한국 힙합은 넓습니다. 직접 괜찮은 음반을 찾아서 가사를 들여다 보세요. 개인적으로는 한국대중음악상 쪽에서 시상하는 음반들이 입문하기 좋았습니다.

#음악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