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계전선> 일상과 도시의 최전선에서
“도시의 이름은 '헬사렘즈 로트', 한때는 뉴욕. 하룻밤 만에 붕괴와 재구성을 거쳐 이차원의 경계가 된 도시는 지금 ⋯ ⋯ . 이계와 인접한 경계점, 지구상에서 가장 험악한 긴장지대로 변했다.
안개로 흐릿해진 도시에 꿈틀되는 암흑과학, 초상생체, 마도범죄. 한 걸음 잘못 디디면 현세는 침식당해 거스를 수 없는 혼돈에 삼켜지고 만다.
세계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암약하는 비밀결사 라이브라. 이 이야기는 그 구성원들의 싸움과 일상을 기록한 것이다.”
참으로 간결한 설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매 화를 시작할 때마다 나오는 이 짧은 문구야말로 이 작품의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이번에 읽은 작품은 <혈계전선> 원작 만화책 시즌 1입니다. 총 단행본 10권 분량으로 이 시즌 1의 내용을 기반으로 애니메이션 <혈계전선>의 시즌 1, 2가 만들어졌습니다. (단, 시즌 1의 '화이트'와 '블루' 시나리오는 애니메이션 오리지널입니다.)
<혈계전선>의 구조는 단순합니다. 쳐다보기만 해도 복잡하게 생긴 도시가 존재하고, 거기서 수없이 많은 일들이 벌어집니다. 당연히 거기에는 세계를 위협할 만한 일도 벌어집니다. 거기서 라이브라가 등장합니다. 라이브라의 활약 끝에 한 차례 위기는 끝납니다.
그러나 <혈계전선>은 일종의 픽스-업 단편 연작입니다. 세계와 캐릭터를 고정한 채 그 안에서 비슷한 플롯의 다른 내용들을 반복합니다. <미션 임파서블>을 짧은 템포로 반복하는 것이죠. 이 반복이 시즌 1의 전체적인 흐름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깔끔하지는 않을지언정 <혈계전선>은 난잡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혈계전선>의 플롯 구조는 정말로 푸가처럼 뚜렷한 테마를 지니고 주제부를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변화하는 도시와 사람을 짓뭉개는 커다란 사건과 사고들, 그럼에도 거기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혈계전선>은 제가 단언코 좋아하는 작품을 고를 때 가장 빠르게 생각나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어떤 점이 좋으냐 하면 글쎄요, 생각하기 힘듭니다. 좋아하는 점은 많습니다만, 딱 잘라 어디가 좋다 하기 힘든 총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은 총제적입니다. 물론 이 작품 안에 '최애캐'가 존재할 수는 있겠죠. 이 작품은 캐릭터가 백미인 작품이니까요. 제프라는 캐릭터를 좋아한다고 합시다. 이 캐릭터는 인간말종 난봉꾼입니다. 하지만 이 캐릭터는 독자적으로 난봉꾼이 아닙니다. 이 캐릭터를 제어하는 캐릭터(체인, 레오)가 있고, 라이벌이자 동료(제드)가 있으며, 그가 일하는 결사(라이브라)가 있습니다. 라이브라를 통해 그는 '헬사렘즈 로트'라는 세계와 관계를 맺고, 거기서 활약을 해 도시를 구합니다.
그러나 '헬사렘즈 로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시시콜콜합니다. 세계 정세가 왔다갔다한다는데 '시시콜콜하다'는 표현은 꽤나 맞지 않다 생각하실 수도 있으나, 저는 시시콜콜하게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헬사렘즈 로트'에는 이미 너무 많은 위기가 있고, 그럼에도 그걸 받아들이는 등장인물들의 태도가 시시콜콜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캐릭터 – 조직 – 세계 간의 사이가 굉장히 유기적입니다. 그리고 다양합니다. 라이브라만 해도 일곱이 넘는 개성적인 캐릭터가 있습니다. 디자인이 요즘의 가챠 게임들처럼 '과도하게' 개성적이지는 않습니다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만화책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어울립니다.
컷을 배치하는 실력도 남다릅니다. 만화책을 보신다면 대다수 컷에 배경이 생략되신 걸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심지어 도시의 풍경을 그릴 때에도 대다수의 배경은 안개 톤에 가려져 있습니다. 캐릭터 디자인이 부드럽고, 배경도 생략된 덕에 만화책을 읽는 동안 우리는 빠른 속도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속도감을 가속해가며 작가인 나이토 야스히로는 하이라이트에 이르러 맞쪽의 스플래시 아트, 그리고 필살기 이름 등으로 사건을 끝내는 기법을 자주 활용합니다.
그럼에도 질리지 않는 건, <혈계전선>의 '헬사렘즈 로트'라는 배경은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고, 거기다가 어떤 상상의 사건, 배경, 인물을 집어넣든 말이 되기 때문일 겁니다.
이렇게 좋아하는 점이 많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혈계전선>이 좋은 점을 딱 잘라 말해볼까요. 역시나 이 작품은 도시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개인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배틀물이 주류인 일본 만화들 사이에서, <혈계전선>은 다른 전략을 취하고 있습니다. 캐릭터들 간의 일상과 액션을 단편 연작으로 다루는 것입니다. 이 짧은 단편의 연속 안에서 캐릭터들은 사람을 압도하는 도시 앞에서 살아남고자 고군분투합니다. 그런 하루하루의 싸움이 일상이 됩니다. 그리고 그 일상이야말로 얻어낼 가치가 있는 것이죠.
<혈계전선>은 세계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암약하는 비밀결사 라이브라, 그 구성원들의 싸움과 일상을 기록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