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책> 비로소 호러를 이해하게 되다

최근에 알라딘 북펀딩을 통해 영화 <헬레이저>의 원작인 <헬바운드 하트>가 출간되었죠. 제가 리뷰할 책은 그 작가 클라이브 바커가 쓴 한참 전에 출간된 단편집 <피의 책>입니다. 대충 2008년 전후쯤으로 여러 판본으로 출간이 되었던 책입니다.

왜 <헬바운드 하트>가 아니라 <피의 책>이냐구요. <헬바운드 하트>는 이제 막 나왔으니 구하고 싶을 때 구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펀딩을 보고, '아, 만약 이번에 저게 잘 팔리면 <피의 책>도 값이 오르겠구나' 싶어져서 값이 오르기 전에 미리 구매해뒀습니다. 아직 가격이 저렴하게 나와있다면 여러분들도 미리미리 구해두시기 바랍니다.

 

사실은 말입니다, <피의 책>은 전에 읽었던 적도 있고 해서 사두기만 하고 읽을 마음이 들 때까지 묵혀둘 예정이었습니다. 네, 원래 책은 사서 읽는 거 아니잖아요. 사둔 거 중에 읽는 거지. 스팀 라이브러리 같은 게, 아니 원래 그 원조 격에 해당하는 게 '내 서재' 아니겠어요.

묵혀둘 예정이었는데 갑자기 펼치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별 게 없습니다. 저는 원래 호러를 못 읽습니다. 못 읽는다는 건 무서워서 못 읽는다는 게 아니라, 재미를 못 느낀다는 사실입니다. 호러를 읽어도 거기서 의도하는 공포나 저 나름의 흥미를 읽어내지 못했었습니다.

작년만 해도 거의 무협에 가까운 작품을 쓰고 있었는데, 그때 주변에서 호러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저에게 '호러'라는 것을 이해시켜보려고 하셨던 게 생각이 납니다. 그때는 '그거 그냥 칼로 무찌르거나 (파훼법 같은 걸) 깨달으면 되는 거 아니냐'하고 전혀 받아들이지 못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데 갑자기 호러가 읽힙니다. 놀랍게도요. 최근에 취직해서 일을 시작한 탓일까요? 정식 근무 일주일차만에 '호러'라는 장르의 핵심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는 느낌이랄까요.

제 친구는 괴담이나 도시전설 같은 것이 '악의'에서 출발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좀 정확하게는 그것이 '출발점'이 악의라기보다는 '경유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출발점은 어디일까요. 그건 이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시스템입니다.

전화 통화를 한다고 합시다. 전화 통화 도중에는 '표정' '시선'이나 '몸짓' 등의 발화들은 모두 편집되어 잘려나갑니다. 통화상으로 듣는 음성 또한 실제로 만나서 듣는 음성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 편집되어 잘려나가 비어있는 공간에서, '이해 불가능성'이 발생합니다. 이 '이해 불가능한' 지점에서 '악의' 혹은 '생명의 위협' 등 공포를 느끼는 순간, 그 순간이 '호러'라는 장르가 발생하는 지점입니다.

네, 노동을 하면 이걸 몸으로 체감하게 되더라구요. 그래서 호러를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이쯤 딴소리를 했으면 '그래서 <피의 책>은 그럼 어땠는데?'하고 궁금해지실만도 합니다. <피의 책>은 상당히 거칠고 터프한 호러 단편집이었습니다. 환상성이 강하지만, 그 환상성은 세밀한 묘사를 통해 표현된 단단한 현실 위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다양한 단편이 가지각색의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은 지하철 도살자와 무기력한 주인공이 소위 '맞다이'를 까는 소설이라고 읽을 수 있겠습니다. <야터링과 잭>은 악마와 태평한 사나이의 한판 승부를 다룬 코미디 호러입니다. <섹스, 죽음 그리고 별빛>은 꼭 로버트 W. 체임버스의 <노란색 왕>을 떠올리게 하는 측면도 있는, 쇼에 관한 단편이구요.

이 소설들은 상당히 날것의, 폭력적이고 성적인 묘사를 가감없이 담고 있습니다. '차라리 영상으로 보는게 덜 잔인하겠다'는 느낌이랄까요. 선혈이 실시간으로 마구 낭자하는 영상보다는 꼭 마치 핏물이 튀어, 그것이 방울방울 말라가는 과정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이 단편집으로 미국에 발표된 것은 1984년으로, 슬래셔나 그런 영화들이 상당히 유행하던 시기입니다. 스래시 메탈 같은 것도 많이 연주되었구요. 지금 읽기에는 상당히 폭력적이라 분명히 취향을 탈 수 있는 책입니다. 불편한 부분도 많을 거구요.

그러나 무미건조함 속에서 사람이 점점 광기에 휩싸이고, 공포에 잡아먹혀 죽거나 혹은 '공포 그 자체'가 되어 다시 타인을 공포로 몰아넣는 상황이 되는 그 감각은 굉장히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읽기 전에 마음 준비 단단히 하고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