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지 못하는 체질이어서
넷플릭스 <킬복순>을 보려다가 오프닝 시퀀스가 끝나고 창을 닫아버렸다. 더 이상 보지 못하겠어서. 만족이 안 되어서는 아니다. 이야기는 시작도 안 했지 않은가. 일을 하다가 슬쩍슬쩍 보려고 틀어놓은 거였는데,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하고 싶어서 끈 건 맞다. 그러나 그 일이 없었어도 그냥 10분 정도 보고 껐을 거다.
진짜 이유는 이미 알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단순히 영화 푯값이 올라서 그런 건 아니다. 극장에 가지 않더라도, 넷플릭스라던가 다른 OTT에도 볼 게 많은 시대가 아닌가. 하지만 그런 것조차 나는 보지 못한다. 지금 내 넷플릭스 구독료는 오로지 어머니를 위한 것이다.
기대되는 영화만 개봉하면 영화관에 가던 시절도 있었다. 마블 영화들이 한차례 히트한 직후 쯤이었다. 하지만 나는 영화관에 한 시간 정도 일찍 도착해서는,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하고 그냥 돌아오기 일쑤였다. 심한 경우에는 상영 직전에 관람을 포기하는 바람에 예매 취소도 못 하거나, 보다가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한때는 시네필이 되어보려고 한 적이 있었다. 혼자서 다사다난한 대학생활을 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소설가를 그만두었고, 예술에 준하는 다른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시절 어리석게도 나는 비평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튠즈 미국 계정을 만들어 국내에서 보기 힘든 영화들을 정식 루트로 구매했다. 기억에 남는 영화가 많이는 없지만, 이름도 긴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의 <버드맨>, 짐 자무쉬의 <데드 맨> 같은 영화들이 하필이면 기억에 남는다.
그때의 나는 당연히 감독의 커리어 전체를 파고 들어야 하는 줄 알았다. 코언 형제를 참 좋아했다. <블러드 심플>이나 <파고> 같은 걸 보면 내용은 전혀 웃기지도 않은데 나는 웃겼다. 그런가 하면 폴 토마스 앤더슨이 <리노의 도박사>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는 걸 난 알고 있다. 그것도 꽤 괜찮은 첫 작품이었다. <스타워즈 : 라스트 제다이>로 <스타워즈>라는 '신화'를 '살해'한 라이언 존슨은 <브릭>이라는 하이틴 느와르로 커리어를 시작했고 말이다.
그런가 하면 아이튠즈 스토어에는 온갖 나라의 작품이 있어서 덴마크 드라마인 <더 브릿지>도 봤고, 뭐 하여튼 시도한 건 많았다.
물론 저걸 전부 영화관에서 봤다는 이야긴 아니다. 말했잖은가, 아이튠즈 스토어라고. 이미 진작에 극장에서 내려가 아카이브로 판매되던 작품들 아닌가. 카페에 아이패드를 올려놓고 이어폰을 꽂아 봤고, 집에서 대형 모니터로 봤으며, 가끔은 버스 안에서 핸드폰으로 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한다. 그땐 스마트 기기가 참 편했는데. 요새는 아이폰 조금만 만져도 아이폰 온도보다 내 머리가 뜨끈뜨끈하고 내 목이 뻣뻣하다. 컴퓨터로 넷플릭스를 틀어놓고 가만히 보고 있자니, 내 인내심이 미칠 지경이다.
나는 좀처럼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미를 지녔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19층에 존재하고, 지하철역은 지하 1층이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것조차 답답해서 나는 20층을 걸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쉬고 싶어도 가만히 집에 앉아있질 못한다. 꼭 밖을 한바퀴 돌다가 저렴한 싸구려 아메리카노라도 하나 주문하고 카페에 머물다 가야 직성이 풀린다. 담배를 안 해서 다행이다. 술은 최대한 가끔 한다.
나는 이게 모두 내 불안과 강박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책을 읽는다 치자. 나는 페이지를 넘기면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그건 만화책도 마찬가지다. 최근엔 게임조차도 포기할 지경이지만, 게임 또한 플레이를 하는 동안 나는 게임 속의 캐릭터나마 움직이고 있다는 기분을 받는다.
그러나 영화, 드라마, 아니면 애니메이션을 볼 때의 나는 다르다. 나는 함부로 2배속을 누르거나, 장면을 넘길 수 없다. 갑자기 나오는 야한 장면에는 내성이 없어서 생략하고는 하지만, 영화를 볼 때에는 최대한 재생 툴바를 보지 않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영화의 러닝타임은 나에게는 신성하다. 놓치는 게 있다면, 영화 자체를 처음부터 다시 보는 것이 옳다. 보면서 딴짓을 하더라도 러닝타임은 유지되어야 한다.
물론 이건 말도 안 되는 강박이다. 소설만 해도 이해 못한 부분이 있다면 뒤로 페이지를 넘겨서 다시 읽지 않는가. 화장실은 어떻게 갔다오라는 말인가. 머리로는 안다. 그리고 화장실 정도야 영화를 멈춰놓고 갔다 온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영화의 러닝타임에게 저지를 수 있는 몇 안되는 실례다.
에릭 사티는 '가구 음악'이라는 개념에 대해 말하고는 했다. '공증 사무소, 은행 등을 위한 가구 음악' '가구 음악은 가구를 보완한다' '가구 음악은 사람을 피곤하게 하지 않는다' '거리낌 없이 들으십시오. 제작 밎 맞춤'이라며 열심히 가구 음악을 피력했다.
영상조차도 이제는 가구가 되어가지만 나는 가구로서 영상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음반의 트랙리스트와 러닝타임에게도 비슷한 존중을 하는 사람이다.
영화관, 사실 나는 영화관이라는 게 무섭다. 광고가 끝나고 불이 꺼지는 순간, 질 좋은 음향기기에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무거운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 순간이 무서워서 영화관에서 도망치고는 했다.
시인 기형도는 영화관에서 죽었다. 그의 사인은 의문사였다. 후지모토 타츠키는 <파이어펀치>에서 말한다. '사람은 죽는 순간, 영화관에 서 있는 거야.' 가만히 앉아서 재미있는 영화를 영원히, 계속 본다고 한다.
나는 영화관에 가는 게 지금도 무섭다. 영화가 재생되기 시작하면 내 입은 꿰메어진다. 그러나 영화는 계속해서 나에게 말을 걸어댄다. 이 미장센은 어때. 이 카메라는 어때. 여기에 이 소리를 더해봤는데 어때. 나는 입이 없다. 그러나 비명을 질러야 한다. 영화관을 박차고 도망쳐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