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월급은 멀었고 퇴사하겠다고 말했다
지금 퇴사하겠다고 말하면 다음 달 중으로 퇴사 가능하냐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진지하게 말하기는 무서웠으므로. 하지만 퇴사를 이미 마음속으로는 결정했는데 더 이상 숨길 수는 없었다.
결국 내일 근무 전에 면담이 잡혔다. 퇴사가 정말로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어떤 사람은 '콜센터잖아. 어차피 대체 인력이 쌔고 쌘 시장인데, 거기다 금방 떨어져나가는 사람 많은 노동 환경인데 퇴사 될걸?'하고 격려해 주었다. 그게 격려라는 건 참 매정하고 웃기다. 그럼에도 나는 두렵다. 내가 퇴사하고 싶다는 사실을 회사에서 받아주지 않을까봐.
퇴사를 하는 것에는 죄책감이 있다. 누군가를 실망시킨다는 죄악감. 동거 중인 어머니. 내가 일을 하지 않던 기간 중 버티라고 푼돈이라도 쥐여주셨던 어머니에게는 이제 내가 용돈을 드리고 싶었는데 금방 그만두게 되었다.
내 젠더조차도 모르게 된 나로서는 친형이라고 불러야 할 지 친오빠라고 불러야 할 지. 아무튼 그 사람은 내가 취직하자마자 격려하면서 옷을 사주고 신발을 사주고 가방을 사주고 심지어 위스키 씩이나 사줬다. 지금도 반 정도나 남아있다. 힘든 날 마시라고 했는데. 어쩌면 힘든데도 마시지 않고 개겨서 이렇게 힘들었던 건가. 하지만 알콜중독이 되긴 싫었는 걸.
사실 회사에조차 미안할 지경이다. 한 달 교육하고 뽑았던 애새끼가 고작 한두 달 일하고 나간다는 게 내가 생각해도 웃기고 그렇다. 돈 벌려고 온 거 아니야? 그럼 돈 벌고 나가야지. 돈 벌려고 오셨잖아요. 뭐가 문제야. 그러게요. 하지만 '안 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바틀비가 말했다.
허먼 멜빌이 <필경사 바틀비>를 쓴 건 <모비 딕>을 쓴 직후다. <모비 딕>을 생생하게 쓰겠다는 일념으로 포경선에 탔던 남자가 어째서 <모비 딕> 직후에 <필경사 바틀비> 같은 걸 써버린 거냐고. <필경사 바틀비>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 못하겠다고 했던 누군가가 생각난다. '안 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러면 바틀비는 거기 왜 있는 거야? 일도 안 할 거면서.
모르겠다. 문학은 퍼즐로 만든 러브 레터에 가깝다. 조각을 맞추어 편지를 완성해도 그 편지의 글귀까지 이해할 수 있다는 법이란 없다. 하지만 나는 콜센터 일을 하는 동안 내내 생각했다. 안 하는 편이 낫겠다. 안 하는 편이 낫겠다. 안 하는 편이 낫겠다. 차라리 끔찍한 꿈을 꾸고 일어나 벌레가 된 자신을 발견하는 편이 낫겠다. 그러면 출근하지 않아도 될테니.
일이 힘들기는 했지만 단순히 일만이 힘든 건 아니다. 카드사 콜센터란 협잡꾼이고 사기꾼이다. 이미 젊은 축의 사람들은 ARS나 앱을 통한 상담에 익숙해져 있기에 실제로 전화 통화를 기다려 들어오는 고객은 50년생이나 60년생이다. 그런 사람들을 상대로, 그 사람들이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어휘를 써서 대화를 한다. 그 사람들을 상대로 금융 상품을 판다. 돈은 시간이 매개된다면 더 큰 돈을 받고 팔 수 있다.
수많은 호러 소설의 주인공들이 생각난다. 호러 소설들, 특히 코즈믹 호러의 주인공이 마지막에 목도하는 것은 죽음을 안겨주는 살인마라기보다는 거대한 존재와 그로 인해 다른 비인간적 존재로 변해 가는 자기 자신이다.
친구가 말했다. 너 회사 들어간 다음에 생산적으로 변했다고. 회사 들어간 다음부터 하는 말들이 전부 비평적으로 하나하나 타율이 높다고. 소설도 감성이 풍부해졌다고. 다 맞는 말이고 좋은 일이다. 하지만 더는 알고 싶지 않다. 나는 이제 모르고 싶다. 그냥 침대에 이불 덮고 베개에 얼굴 처박은 다음 귀도 틀어막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외치고 싶다.
여기서 더 일해봤자 더 형편이 나아지지 않을 것임을 안다. 탈출구나 올라갈 계단 같은 건 없다. 고작해야 콜센터 일으로 쌓을 수 있는 내공 같은 건 없다. 돈 벌어서 저축한 다음 언젠가는 그만둬야 할 일이었을 뿐.
내가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이젠 신이라도 믿고 싶은 지경이다. 예수는 어부 말고도 매춘부, 그리고 세리들과 어울렸지만 그것은 그들이 경건한 믿음을 가지고 죄를 끊어내었기 때문이다. 신이여, 우리를 구원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