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복순> 존 윅에서는 말하지 않았던 것
<길복순> 이야기를 하려는데 <존 윅>부터 이야기해서 미안하지만, <존 윅>은 참 멋있는 영화였다. 키아누 리브스의 절제된 건푸(Gun-Fu)와 과장된 확인사살 동작, 롱테이크를 위주로 한 다양한 촬영방식도 있겠으나, 그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건 역시 <존 윅>이 보여주는 하나의 세계관이리라.
나름 어반 판타지 세계관을 연출하는 작가로서 <존 윅>의 세계관은 매력덩어리다. 뉴욕에 남들은 모르는 킬러 사회가 있다. 그들은 의뢰를 받으며 '콘티넨탈'이라 불리는 호텔을 오가며 작전에 필요한 무기와 자료를 입수한다. 조직 범죄와 킬러 사회이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자멸하지 않도록 '규칙'에 스스로를 옭아맨다.
그러나 그 세계관은 절대로 직접적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적어도 <존 윅> 본편에서는 그렇다. 대신 이런 사항들을 '영화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왜 존윅이 그렇게 많은 총알과 구타에도 죽지 않는가? 단 한 줄 최소한의 설명만이 있다. '방탄 수트라서요.' <존 윅>은 말을 많이 하지 않기 때문에 품위 있는 영화고, 때로 던지는 농담은 재치가 있다.
그런데 그럼 <길복순>은? <길복순> 또한 <존 윅>과 같이 비정한 킬러 사회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취하는 방향성은 정반대다.
오프닝 시퀀스를 보자. 주인공 길복순은 야쿠자 대장을 납치해 와 길에서 깨운다. 원래는 자는 중 죽일 예정이었지만, 약간 마음이 바뀌었다는 말과 함께 카타나를 던져주고, 자신은 도끼를 들어 결투를 벌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길복순은 수를 읽다가 패배를 예감한다. 장비의 격차 때문이다. 이마트에서 3만원 주고 산 도끼로 명검을 이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잠깐! 장비를 바꾸는 척 하면서 야쿠자를 총으로 쏴 죽인다.
<인디아나 존스 2> 였던가. 검법을 보여주는 악당을 인디아나 존스가 총으로 쏴 죽인 장면이있어 하나의 상징처럼 쓰였던 적이 있다. 여기서는 문명과 야만을 구분짓는 경계처럼 연출되었지만, <길복순>에서는 다르다. 암살 대상이었던 야쿠자는 오히려 명예를 중시하는 사무라이로 보이고, 길복순은 능력주의 기업 사회의 비열한 킬러로 비춰질 뿐이다.
만약 <존 윅>이었다면, 두 사람 모두 서로의 명예를 걸고 한 판 승부를 벌였을 것이다. 누구도 비열하지 않았고, 정직하게 액션으로 승부를 한 다음 누군가 과장된 확인사살 동작으로 결투를 닫았을 것이다. 길복순은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그냥 회사원이니까.
그리고 영화 제목이 나오기 시작한다. <길복순>이라고.
<존 윅>은 최대한 세계관에 대해 입을 여는 걸 자제하려고 했다. 그들의 세계관은 관객들에게도 은폐된 채 은유로만 전달된다. 옛날 주화, 콘티넨탈 호텔, 성역, 최고 의회, 혈판장. 관객들은 온전히 설명받지 못하지만, 그렇기에 뒤에서 뭔가 대단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느끼며 영화의 내용을 판타지마냥 신비하게 받아들인다.
<길복순>은 <존 윅>과 유사점이 많은 킬러 세계관을 차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세계관을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다. 대신 이렇게 보여준다. '야, 세상 사는 건 다 똑같아.' <길복순>이 보여주는 기업 킬러 사회는 오히려 현실의 기업 사회를 키치하게 과장해서 웃음거리로 삼는다. 이걸 수전 손택은 '캠프'라고 불렀던가.
길복순은 MK라고 불리는, 기업 킬러 사회의 규칙을 만든 대기업에 다니고 있다. 심지어 A급 간판 킬러로, 그녀가 맡은 '작품' 보수는 자릿수를 세기도 벅차다. 한편 MK 밑에만 해도 수많은 '연습생'들이 매월 시험을 치르고 있다.
이런 킬러 사회의 구조는 어느 정도는 연예기획사를 닮아있다. 실제로 작중 길복순이 회사가 하는 일을 숨길 때 '이벤트 회사'라고 거짓말한다. 영화 감독이 각본도 같이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레퍼런스로 삼기에 연예기획사는 그의 입장에서는 적절한 업종임에 충분하다.
숨겼던 것을 드러내는 과정은 잔인하고 두렵기까지 하다. <존 윅>은 치부를 숨기고 오히려 신비로 포장했기 때문에, 스타들이 계단을 밟고 자신을 방해하는 킬러들에 맞서 올라가는 장면은 숭고하게 그려진다. <길복순>은 오히려 이 '스타'에 해당하는 킬러들을 둘러싼 기업 사회는 사실 비정한 시스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다들 대기업의 A급 간판 스타가 되고 싶어하지만, 실제로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인생은 더 나아질 게 없다. 길복순이나 차 대표와 같은 '실력자'들까지 규칙에 얽매여 있다. 오직 순수하게 '악당'으로 연출되는 차 이사만이 원하는 것을 가지기 위해 욕망대로 행하지만, 그녀 또한 결국 그 끝이 좋지는 않다. 김지영은 연습생으로, 길복순의 작품을 돕다가 커다란 음모에 휘말린다.
킬러 사회의 바깥에 있는 길복순의 딸인 길재영 또한 마찬가지다. 길재영은 스스로가 레즈비언임을 자각하지만, 그로 인해 협박받고 타인의 시선을 자각한다. 실제로 그녀가 작품 내에서 큰 잘못을 했느냐 하면, 원인 자체는 그녀에게 있지 않다.
잘못한 것이 없는 인물들이 '사회'라는 시스템 안에 갇혀서 고통받는다. 그 고통을 참지 못하고 분노를 터뜨리거나, '일'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한 결과 다시 서로를 상처입힌다. 모순은 누적되고, 시스템은 붕괴한다.
액션은 충분히 좋은 영화였다. 꼭 새로운 연출이 있었다고는 말 못하겠다. 연출에 있어서는 <킹스맨>의 교회 장면이 떠오르는 듯 했다. 특히 차 대표가 블라디보스토크 출장에서 '작품'을 만드는 장면에서는 말이다. 적어도 액션을 보겠다면 시간이 아깝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길복순>이 마냥 좋은 영화냐고 하면, 그런 건 아니다. 쌓여가는 모순과 붕괴하는 시스템에 대한 감각은 충분하나, 더 나은 비전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촌스러운 지점도 분명 있다. 길복순이 '미래의 수를 내다보는' 연출은 마지막 장면에서는 멋지게 쓰였으나, 정작 그 장면을 제외하고는 중요한 장면에서 멋있게 쓰이지 못했다. 오히려 사소한 장면에서만 활용되어 일관되지 못한 느낌을 준다.
또한 작품의 연출이나 미장센 또한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작품은 너무나도 만화적이다. 웹툰이나 일본 만화, 그래픽노블을 보는 느낌인데, 아마도 <존 윅>과 다른 길을 가기 위한 과장된 경박함 때문이리라. 오히려 마음에 드는 점이기는 했으나, 진지한 걸 원하는 사람에게는 와닿지 않을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점들 때문에 이 영화를 마냥 '별로다'라고 말할 수는 없겠다. <길복순>이 완벽한 영화라고까지는 않겠으나,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지점이 많은 영화이며 한번쯤 권할 만은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