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심연 속에서 우리는 계속 쓴다

까놓고 말해 예술, 특히 창작을 누가 시켜서 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어릴 때 피아노 학원 보내고 기본적인 독서 교육 정도야 시키는 게 사회 풍조라지만, 그렇다고 학생들이 세계적인 작곡가가 되거나 작가가 되는 것까지 바라는 부모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부모가 그걸 강제하는 순간, 비극이 시작된다.

그렇다면 대다수의 창작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단순하고도 복잡하다. 단순한 이유는 '그런 걸 많이 접할 수 있는 환경에서 태어났기' 때문이고, 복잡한 이유는 '그런 환경'은 비밀리에 전수되기 때문이다. 필자만 해도 귀로 들으며 이야기를 컸다. 어릴 때 가족들이 <셜록 홈즈>나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이나 전래 동화 같은 걸 입으로 들려줬던 것이 지금까지도 뿌리로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한 방울이 모자라다. 일전에 지인과 이야기한 적이 있다. '작가로서 스타트에 100권 내지 1000권 정도의 경험이 필요하다면, 대성하는 데에는 10,000권의 경험이 필요한 것 같다.' 그러나 '그런 경험'을 하도록 몰아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작가 본인이다. 하지만 대관절 어떤 원동력이 작가를 10,000권 가량의 경험을 겪도록 몰아간단 말인가?

 

물론 기구한 생을 살다 가는 작가도 많다. 특히 일제강점기 조선을 살다 간 시인들. 그들에게는 '평범한 삶'이 허락되지 않았으니, 그들의 일생은 정치적으로 첨예하거나, 비극이거나였다. 이상이 일찍 요절한 거야 유명하고, 정지용은 납북 과정 중 폭격에 희생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가족을 만나러 간 사이 휴전선이 그어지는 바람에 백석의 시는 한동안 금서로 치부되었다.

어떤 작가는 스스로 환난을 찾아간다. 허먼 멜빌은 <모비 딕>을 쓰기 위해 배에 올랐다. 조지 오웰과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스페인 내전에 참가했고 그 경험이 소설에 반영되어 있다. 스콧 피츠제럴드는 젤다 피츠제럴드가 재발굴된 지금 스스로의 부정함과 불안증으로 아내와 자신을 파멸로 몰고간 작가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대관절, 무엇이 작가를 그 지경으로 몰아간단 말인가. 고작해야 글줄 몇 줄 쓰기 위해서 새로운 자극을 찾고, 통제력을 잃고 미쳐가는 도중에도 뭔가를 쓰기 위해 펜을 잡고, 결국 사람 신세 망치게 만드는 창작이라는 게 뭐길래 계속 창작을 하게 만드는가.

 

가끔 듣는 말이 있다. '노력 없이 존잘님 연성을 할 수 있는 손을 얻고 싶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니지만, 아니. 사실 이해 못한다. 나는 창작이라는 행위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실력이 모자란다면 그대로도 좋다. 그만큼 못하는 것도 과정의 일부로서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이 좋다. 그렇게 한 번 못하고 나면 다음엔 더 잘 될 거라는 막연한 믿음까지도 좋다.

혹자는 '네가 그래도 실력에 비해 눈이 낮아서 만족하는 거'라고 한 적도 있다. 부정하진 않겠으나 그 말은 반쪽짜리다. 나는 내가 지금 쓰는 글을 완성하면 다음 작품은 더 잘 쓸 거라는 사실을 알고 철석같이 믿는다. 다음 작품을 완성하고 나면 그 다음 작품은 더 좋을 것이다.

다른 사람은 말한다. 그렇게까지 창작을 좋아할 수 있다면 그건 재능이라고. 그런 점에서는 타고 난 재능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결국 무엇이 나를 그 지경으로 몰아가고 있는가. 더 이상 이걸 그만둘 수 없다고 속삭이는 머릿속의 귀신은 무엇인가.

 

펑크 록의 대모로 유명한 패티 스미스 또한 <몰입>에서 그 정답을 밝혀내 보려 한 적이 있다. “왜 글을 쓰는가? 합창이 터져 나온다. 그저 살기만 할 수 없어서.”

대다수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창작을 하고 싶어 하진 않는다. 창작물에 많은 걸 바라지도 않는다. 만화 <체인소맨>을 보고 울었던 적이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려 했을 뿐인데 오히려 그로 인해 타인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작가인 후지모토 타츠키가 영화광에 서양화 전공이라는 사실을 듣자, 나는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게임 <앨런 웨이크 2>는 조금 궤가 달랐다. 자신을 휘감는 공포의 수렁에서 빠져나오고 싶어서 창작을 하는 사람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런 걸 즐기고 감동을 받았다고 하면, 사람들은 나에게 특이하다는 반응을 보이곤 한다. '어 그래? <체인소맨>은 나한텐 어렵던데. 나는 딱 <귀멸의 칼날> 수준인 듯.' 내지는 '<앨런 웨이크 2> 하고 있다고? 진짜 너 다운 게임 하네.' 같은 말을 들었다.

 

사실 정답은 없는 문제다. 작가는 개별적이기에 가치를 지닌다. 우리는 후지모토 타츠키라는 '유일성'에 찬사를 보내고, <컨트롤>이나 <클레르 옵스퀴르> 같은 게임의 독특한 개성에 감탄하며, 한강이라는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감성'에 대해 정치적 위치나 작품성 등을 고려하여 '상'을 매긴다.

그들은 이미 개별적인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미 평범한 사람들과 일상적인 대화조차 힘들 때가 많다. 돈과 명예 같은 건 이미 관심이 없다. 사회적인 금기조차도 가끔은 무시의 대상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영혼일 따름이다.

 

이렇게 말하면 그들의 영혼은 충만해 보인다. 실제로 영혼이 충만한 사람도 여럿 있다. 하지만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들은, 적어도 스스로는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좋아하는 게 없어'라는 착각 같은 걸 스스로 품고 산다. 겉보기에는 누구보다도 창작을 좋아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취향이 누구보다도 뚜렷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기만이 이런 기만도 따로 없어 보인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자. 그들의 창작물이 사회적 인정을 받기란 쉽지 않다. 그들의 구성성분은 이미 평범한 타인들과 다르다. 우월 같은 걸 논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다르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이해하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그들은 쉽게 창작을 그만둔다. 물론 개중에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도 분명 존재한다. 발을 깊게 담그지 않은 사람들.

하지만 이미 발을 깊게 담갔다면, 헤엄치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이 물 속에서 빠져나오기란 불가능한 법이다.

 

그럼에도 사람은 물 속에서 숨을 쉴 수는 없다. 뭍으로 나가려 사람은 헤엄치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창작물이 파도처럼 밀려나온다. 우리가 '명작'이라고 받아들이는 무언가는 대체로 깊이 가라앉은 사람의 발버둥이다.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가 사소할 수는 있다. 초심을 되새기는 것이 중요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깊이 가라앉은 상태에서 헤엄을 위해 뻗은 손, 그 내뻗음이야말로 창작의 근원이다. 심연에서 나가기 위해 우리는 읽고, 생각하고. 그리고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