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부수고 아브락사스에게 날아가기

아타나시우스 키르허. 17세기 예수회 수도사였던 그는 이집트학에 정통하여 1633년에 콥트어를 배웠고 1636년에 콥트어 문법책을 출판했다. 1650년에서 1654년 사이 그는 콥트어 연구와 연관된 이집트 상형문자의 번역을 출간한다.

후세에 로제타 스톤이 발견되고 나서 이집트 상형문자에 대한 키르허의 연구는 어처구니 없는 상상의 소산으로 밝혀지게 된다.

 

상상의 소산, 창작물. 회화, 음악, 거기에 소설까지. 예술가는 창작에 매달려 살아가며 작업이야말로 경건한 하나의 종교적 행위로 간주한다. 오로지 해야 할 것은 작업뿐이다. 창작만이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이며, 창작이 없는 세계는 의미를 잃는다.

창작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단순하다. 재미있어서. 나만의 세계를 가진다는 행위 자체가 원초적인 재미를 불러 일으켜서. 머릿속으로 상상한 풀잎 하나 하나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고, 불어오는 바람의 온도나 비가 내리는 모양새에 별명을 붙이는 게 좋았다. 나름대로의 테라리움을 만들고, 하루종일 그 안에 있는 게 좋았다.

그 테라리움을 만드는 데에는 재료가 필요하다. 고흐는 언제나 좋은 그림을 그리는 데 재료가 들어서 정작 작품을 팔고 나면 남는 게 없다는 한탄을 했다. 똑같은 경험을 했다. 좋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흡사 고고학을 하듯 다른 창작물을 파내려갔다. 금전적으로는 항상 손해를 볼 뿐이었다. 모 사람이 말하기를 그렇게 파내려가다가는 모라토리엄밖에 선언할 게 없을 거라고 충고했지만 나는 지금도 멈추기가 어렵다. 그저 디폴트의 속도를 늦추려고나마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테라리움을 일구기 위해 일이 필요했다. 남들처럼 번듯한 직장은 아니어도 좋을 거라고, 창작을 위한 시간을 확보할 수만 있다면 적당히 아무 일이라도 상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순진했나? 아니면 나약했을지도. 가족들에겐 한 달도 안 되어서 그만둔다고 타박을 들었다.

더 나쁜 건 그만둔다고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놈의 창작은 돈이 되어주지 않는다. 돈을 위해서 창작하는 건 비루한 거라고 거장들은 말하곤 하지만, 이젠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원하는 걸 만들기 위해서는 새 일자리가 필요하다. 새 일자리가 더 나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굴레에 갇혔다는 걸 깨달았다. 사랑할 수 없는 일을 하고, 무의미한 하루를 반복하다가 퇴근 후에 반짝 창작을 하며 깨달음을 얻고, 다시 매일매일을 반복한다. 깨달음은 산산이 조각난다. 빠져나갈 수가 없다.

모르겠다. 죽어야 하나? 보통 누구 하나 죽는 게 루프를 끊어내는 방법이던데. 참을 인 세 번이 살인을 면하듯 창작 한 번이 매일의 충동을 막아내고 있다. 어쨌더나 뭘 만들려면 살아있어야 하니까. 그런데 내가 살려고 뭘 만들어내는 건지 뭘 만들어내려고 살고 싶은 건지 이제는 선후관계도 명확하지 않아서 잊어버린 것 같다.

 

창작이 사람을 잡아먹는 걸 많이 봤다. 툭하면 언급하곤 하는 <앨런 웨이크> 같은 게 좋은 예시겠다. 호러 소설 작가가 자기가 쓴 호러 소설에서 탈출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런 단순한 게임 속 이야기가 아니다.

글 좀 쓰다가 이상해진 사람들을 많이 봤다. 나는 이제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지나가는 사람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전우치에 대해서는 안다. 최동훈의 영화 <전우치>에서 강동원이 열연해줬기 때문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바로 옆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우치>에 대해 더 잘 안다.

타인의 작품에 대해서도 그런데 자기 작품이야 오죽할까. 나는 머릿속의 인물을 끄집어내기 위해 인물을 설정하고, 이 녀석은 뭘 입고 어떻게 생겼을까를 고민하며 일러스트를 그리며, 소설에 투입하여 살아있는 캐릭터로 만든다. 나에겐 회사 동료 직원보다도 이 캐릭터들이 더 생생하다.

 

내가 만들어낸 이 녀석들이 없는 세계를 쳐다본다. 아무도 말걸지 않는다. 그렇다고 조용한 것은 아니다. 나에게 뭔가를 자꾸만 요구한다. 내가 하는 일에는 전혀 실재감이 없고 아무런 의미도 느껴지지 않는다. 긍정적인 가치를 매길 수조차 없다.

이제는 창작과 분리 불안을 겪는 듯 하다. 작업중인 화면이 보이지 않으면 나는 울 것 같고 토할 것 같다. 뭔가를 쓰지 않으면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 같으며, 그만두게 된다면 나나 다른 사람이 뭔가를 하지 않아도 알아서 저절로 죽게 될 거라는 확신이 있다.

 

하지만, 소설의 주인공은 결국 가짜 세상을 내버려두고 진실된 세계로 나아가지 않던가? 굳이 <매트릭스>나 <다크 시티>, <트루먼 쇼> 같은 진부한 예시를 들지 않아도 말이다. 심지어 <외톨이 더 록!>에서도 히토리 고토는 자아의 알을 깨고 사람들을 만나 결속 밴드를 만들지 않느냐고.

아직까지도 알을 깨기가 무섭다. 나는 <외톨이 더 록!> 첫 화를 보다가 관뒀다. 그때 <수성의 마녀>라던가 다른 '매운' 작품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차라리 <외톨이 더 록!>을 보는 게 더 힘들었다. 이 캐릭터는 성장해서, 나를 내버려두고, 작품 속 다른 캐릭터들과 함께 스스로의 인생을 살아나갈 거라는 사실이.

내가 온실 속의 화초인지까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서울 잘 사는 동네 출신이 아니라는 건 내 쓸데없는 자부심 중 하나다. 하지만 작은 텃밭의 테라리움에서, 테라리움을 둘러싼 유리알을 깨고 어떻게 아브락사스를 향해 날아가야 할 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