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를 받아들이는 자세 <아바나의 우리 사람>

대뜸 하는 말이지만, 픽션이 허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다.

물론 <007> 이라던가 <제이슨 본>은 진짜 벌어진 일이 아니다. 뉴욕 한복판에서 <존 윅>은 총을 쏘지 않았으며, 하물며 <반지의 제왕>이나 <던전 앤 드래곤> 같은 가상 세계가 실존하지는 않는다. 먼 미래에 <스타 워즈>나 <스타 트렉>과 같은 일이 일어날지는 현재의 우리로서는 모르는 일이다.

그럼에도 픽션을 보는 이유는 독자에게 제공하는 것은 한 톨의 믿음 때문이다. 어딘가 꿈과 희망이 넘치는 환상이 있을 거라는 믿음. 모험의 흥미진진함이나 무찔러야 할 사악한 악, 그리고 정의의 승리 같은 거라도.

하지만 어느 순간, 픽션이 해체되는 것을 보았을 때 깨달았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모험이나 악, 정의 같은 게 없었다. 그저 톱니바퀴가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톱니바퀴 소리에, 아무런 의미도 부여할 수 없었다.

소개가 늦었다. <아바나의 우리 사람>은 그레이엄 그린의 장편 소설이다. 스파이 소설이지만 코미디 장르로 시놉시스부터가 상당히 유쾌하다.

쿠바의 아바나를 배경으로, 진공청소기 판매상인 워몰드가 영국 비밀 정보부 요원이 될 것을 제안받으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하나뿐인 딸의 뒷바라지를 위해, 워몰드는 돈을 받으며 스파이 활동을 가짜로 꾸며낸다. 거짓말에 불과했던 스파이 활동이 워몰드의 현실을 잠식하기 시작하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영국은 스파이 소설의 본고장이다. 이언 플레밍, 존 르 카레 등 수많은 스파이 소설 작가들이 영국 출신인데, 이들 대다수가 MI6 요원 출신이라는 사실마저 유명하다. 가까운 미국만 해도 탐정, 경찰이나 군인 출신이 은퇴 후 범죄 소설 작가가 되는 일이 흔한데, 영국도 비슷한가보다. 그레이엄 그린은 스파이 출신은 아니지만, 정치적 색채가 진한 작가로서 어느 정도 맞닿아는 있는 것 같다.

이 두 가지 사실만 보면 굉장히 ‘엄격한’ 스파이 소설일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대화는 코믹하며, 악당들은 어리숙하다. 주인공은 한숨만 푹푹 내쉰다. 그레이엄 그린은 이미 <아바나의 우리 사람>을 쓰기 전에 ‘진지한’ 다른 작품을 숱하게 쓴 작가였고, 이 작품은 집필 의도 자체가 근엄하게 작품을 써내려가는 게 아니었다.

가끔 이런 장르를 쓰는 작가들이 ‘웃긴 작품’도 쓰지 않던가. 나는 히치콕의 <해리의 소동>이라는 작품의 존재를 좋아한다. <싸이코>나 <새>,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같은 작품이나 찍던 사람이 찍은 코미디 영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굳이 이 작품을 읽으려고 발버둥을 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추리, 미스터리, 혹은 스릴러. 이 세 장르는 매대에서 한 데 묶인다. 그리고 이 매대는 손대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다. 한국에서 <아바나의 우리 사람>은 ‘열린책들 세계문학’으로 분류되지만, 그것은 ‘영국 스파이 스릴러’라는 장르적 특수성에 기인한다. 마치 동구권 SF가 출판사 ‘현대문학’에서 출간되듯이 말이다.

<아바나의 우리 사람>은 영문판으로 이미 읽은 적이 있다. 그럼에도 또 읽은 이유는 일단 영문판이라 제대로 읽지 못했고, 겨우 읽은 내용도 다 까먹었기 때문이다. 나는 시놉시스를 읽고 이 작품의 내용을 처음 알았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다 읽었다. 사흘이 걸리지 않은 것 같다. 대다수의 평범한 작품은 말을 하지지 않는다. 이는 작품의 문제일 수도, 독자인 나의 문제일 수도 있다. 말을 거는 몇몇 작품은 내게 상처를 낸다. 이들은 대체로 그래도 ‘좋은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실제로 내가 마음에 들어하는 작품은 내게 흉터를 내는 작품들이다.

<아바나의 우리 사람>은 둘 다 아니었다. 다 읽고 허탈하기가 그지없었다. 그리고 주마등처럼 나를 이룬 여러 작품들의 모습이 스쳐지나가는 것이다. 소설, 음악, 영화에서부터 비디오 게임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작품들이 나에게 하던 말을 스쳐 보내다가, 꿈에서 깨어나 자리에 앉은 기분이었다. 깨어났을 때 든 기분은 비참함 같은 게 아니었다.

그냥 허탈함이었지.

삶에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은 보통 실존주의 철학을 본다. 특히 고등학생 때나, 대학생 때 자주 보게 되는 건 카뮈나 사르트르, 혹은 니체 등이다.

주변에 철학도가 꽤 있었기 때문에, ‘실존주의’라는 걸 들입다 팠다. 한번 떠먹어 보려는 시도조차 아니었고, 그냥 들입다 팠다. 실존주의의 계보는 키에르케고르부터 시작해서 쇼펜하우어와 니체에서 기독교와 선을 긋는다. 카뮈, 사르트르, 그리고 하이데거 등에서 ‘실존주의’로 명명될만한 작업물들이 나온다. <시지프 신화> <존재와 무> 그리고 <존재와 시간> 같은.

그러나 이들은 철학적으로 순수할 수 없었고, 하이데거의 제자인 한나 아렌트 등에 이르면 정치철학으로 귀결된다. 결국 ‘철학의 의미’라는 것도, ‘정치성’과 동떨어질 수 없는 거라고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마치 오펜하이머의 연구가 정치와 분리될 수 없듯이 말이다.

픽션 또한 마찬가지다. 픽션은 기계장치에 불과하다. 거기에서 의미를 찾으려 해봤자 우리는 거기서 우리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춰 볼 뿐이다. 그러나 그 거울상에서 우리는 하나의 흐름을 마주하게 되고 … … .

이 흐름은 우리를 어딘가 다른 곳으로 안내한다. 그것이 어디가 될지는 작가와 독자만이, 아니, 아무도 모른다. 기형도가 <대학 시절>에서 말하듯, ‘나뭇잎마저 무기로 사용’되는 시대에서 픽션은 자유로울 수 없다.

왜 갑자기 <아바나의 우리 사람> 이야기하다가 뜬금없이 실존주의 이야기하더니 또 갑자기 픽션의 정치성 이야기하는지 모를 것이다. 이는 개인적인 고민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바나의 우리 사람>은 굉장히 정치적인 글이기 때문이다.

그 시절 스파이 소설이란 굳이 이 장르의 거장인 존 르 카레 이야기를 꺼내지 않더라도 (오히려 존 르 카레보다 이전부터 활동해온 그레이엄 그린의 후기작이기에) 정치에 대해 다루기 마련이고, 때문에 다루는 내용은 상당히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아바나의 우리 사람>은 가볍게 쓰였다고는 하지만, 영국 정보부를 풍자하려던 목적이 분명히 있었다.

핵심은, 주인공인 워몰드가 정보부를 농락하는 방법이 ‘가짜 보고서’로 ‘가짜 요원’이나 ‘가짜 정보’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허구의 존재들은 정보부를 교란하고, 정보부로 하여금 특정한 사고를 하게 만든다. 세계 정세를 주름잡는 허구(Fiction)가 워몰드의 손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워몰드를 둘러싼 정보부 사람들은 ‘허구’를 믿는 사람들이다. 허구로 쓰인 내용을 믿는 사람들에 의해 워몰드와 그 주변부의 ‘진짜 세계’는 위기에 처한다. ‘작가’가 쓰는 ‘허구’에 ‘의미’가 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들. 사실 전부 거짓말인데 말이다.

픽션을 좋아하는 사람이긴 했다. 픽션이 허구라는 사실을 마음 한켠에서는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을 깨달은 지금은 앵간한 대다수 작품에 별 흥미가 없다. 그것이 심지어 그게 내가 쓰는 작품이어도 그렇다.

테라리움을 만들어 그 안에 꽃이라도 집어넣듯, 픽션을 만들어 거기에 나 자신을 투영한 뭔가를 집어넣은 다음 두고두고 쳐다보고 싶었다. 앞서 말했듯, 픽션의 설계도와 그 작동 원리, 효과까지 알게 된 다음부터는 팍 식어버렸지만 말이다.

워몰드가 픽션을 쓰기 시작한 건 딸인 몰리를 위해서다. 그는 영국 정보부에 충성하기 위해, 혹은 자기가 만들어 낸 가상의 세계를 사랑한 게 아니었다. 그에게 실존하는 세계는 정보부와 그 파워 게임이 아니며, 자기 자신과 딸 몰리 뿐이다.

워몰드와 딸과 새로운 아내와 함께 다른 세계로 떠나는 것을 보고, 나도 내가 발을 걸친 어느 세계를 벗어났음을 느꼈다. 그게 정치적인 기계 장치 놀음인지, 아니면 내가 만들어 낸 가상의 세계인지는 잘 모르겠다. 무언가에 대해 마음을 접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편하게 된 게 아닐까.

나는 책을 덮었다. 세계는 그 안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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