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강

문학

'읽기'는 여기서는 많은 걸 포괄하는 단어입니다. 굳이 서적뿐만 아니라 영화, 게임과 같은 종합 미디어나 심지어는 음악마저도 포괄하기도 합니다. 요즘은 미디어가 마구 쏟아지는 시대죠.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미디어를 읽어내기를 강요받습니다. 이번 주 넷플릭스 신작, 어떤 아티스트 신보, 너무 많이 보다 보면 결국 '뭘 볼까' 결정하는 단계에서 '로튼 토마토'나 '메타크리틱'같은 '비평가' 내지는 '큐레이터'에게 사고를 외주 주기도 하고, 뭐 그렇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고 쌩으로 부딪혀보는 사람도 존재하지요. 많이 읽다가도 불현듯 읽기를 멈추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유야 다양합니다. '읽을 여유가 없어서'가 대표적일 겁니다. '재미가 없어져서'도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취향이 있습니다만, 가끔은 취향이 사람을 잡아먹는 일도 존재합니다. “너는 SF를 좋아하니까, 이번에 나온 넷플릭스 신작 영화를 꼭 봐야 해. 그게 너를 구성하니까.”

어느 순간부터 '취향'은 일이 되어 사람을 갉아먹어요. 누구나 미디어를 감상할 때 취향 하나 쯤은 있습니다. “이 사람은 '호러'를 좋아하고, 저 사람은 '무협'을 좋아하니까 나도 하나쯤은 뭐가 있어야 한다.” 잘 갈고 닦아진 취향은 그게 없는 사람들이 보기에 멋있습니다. 질투가 날 정도죠. 그 결과 우리의 '라이오스 짤'은 무한정 확대 재생산되기에 이릅니다. “진짜 '드래곤 마니아'들을 보면 ⋯ 내 어중간함에 신물이 나 ⋯ !” 미친듯이 많이 읽는 게 장땡이라고 생각하던 순간이 저도 물론 있었습니다. 10대 ~ 20대 초 쯤은 '취향을 형성하는' 기간이라고 누가 말하더라구요. 한국 판타지 씬에서는 이영도에서부터 시작해서, 그 시절 신전기 라이트 노벨,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이 번역된다고 해서 3권까지도 읽어보고, 국내에는 없는 작품까지 읽어보려고 <디스크월드>의 야경꾼들을 다룬 파트나 아이튠즈 미국 계정까지 만들어 영상물을 구매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많이 보려고 한 이유라면 그야, 저는 그때는 '작가'를 할 거라고 굳게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한쪽에서는 무엇으로 먹고 살건 간에 다른 한 쪽에서는 '문필가'로 살 겁니다. 그건 그만두고 싶다고 그만둘 수 있는 건 아닐 거구요.

많이 본 걸 후회하는 건 아닙니다. 그땐 '컨텐츠'가 쏟아지는 속도가 지금같지 않았습니다. 물론 저야 과욕을 하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는 감당해 낼 체력이 되었습니다. 구매한 컨텐츠가 100이라 치면 거기서 할인이 반은 들어갔고 그 중 반은 읽었으니 남는 장사라 이겁니다. 근데 어느 순간부터 그게 '안 먹어지는' 순간이 옵니다. 사놓은 건 유통기한이 다 되어서 차마 못 보겠고, 새걸 사자니 구매할 여유도 사고 나서 읽을 여유도 안되는, 그런 순간이 옵니다. 보통 그때쯤 먼저 깨닫는 건 '내 취향의 작품을 모두 다 먹어볼 필요는 없다'는 걸 겁니다. <카우보이 비밥>이 전설적인 작품이라고 해서 모두가 그걸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야 <카우보이 비밥>은 그 세대 사람들이 그 세대에 맞는 방식 – 주 1회 24회 분량 – 으로 보았기 때문에 전설적인 것이지, 지금 세대 사람들이 굳이 <카우보이 비밥> 24화를 하루종일 몰아본다고 그때만큼 재미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요즘 느끼는 건, '취향을 다듬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남의 취향이 부럽다고 새로운 취향을 추가하거나, 무리하게 확장하는' 게 아니라 말이죠. 한동안 '남의 취향'을 질투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야 잘 다듬어진 취향은 그 사람의 '세계'니까요. 다른 사람들의 세계가 넓고 잘 다듬어진 걸 보면서, 왜 나는 저만큼 못 따라가나, 저런 세계 속에서 살아갈 수 없나 하면서 소외감을 느끼는 때가 있습니다. 사실은 지금도 조금은 그래요. 그때 필요한 건, 잠깐 뒤돌아보는 겁니다. 여태껏 뭘 읽어왔나, 어떤 세계를 봐왔나 하구요. 그러다 보면 불현듯 깨닫는 순간이 옵니다. 나는 먼 길을 왔고, 그 사람들과 방향이 달랐을 뿐이구나.

그래서 요즘은 예전에 읽었던 작품을 다시금 읽어보고 있습니다. <듀라라라!!>나 <마법사의 신부>라던가, 아니면 <존 윅> 시리즈 같은 것도 좋았구요. 마음같아서는 예전에 읽었던 <디스크월드> 원서를 읽어보고 싶은데, 영어 실력이 떨어졌을 게 뻔해서 읽는 게 무섭습니다. 더 어릴 때 취향으로 건너가서 <셜록 홈스의 모험>도 좋구요. 이렇게 되짚어가다보면, 슬슬 누군가 말 거는 목소리가 들려 옵니다. 그건 아마 아직 태어나지 않은 소설 속 인물들의 목소리일 겁니다.

#문학 #에세이

브릿G 끼앵끼앵풀 – <대화>

가끔 작가들은 작품이 작가와 독자의 대화라는 측면을 망각하고는 합니다. 굳이 직접적인 메시지의 주고받음이 아니더라도요. 덧글창에서 덧글로 한마디 남기기도 하고, 리뷰로 장문 감상을 남기기도 합니다. 작가 – 작가 간의 관계라면, 작품으로써 대화하기도 하겠죠.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게 이전에는 일방통행적이었을겁니다. 1900년대만 하더라도 러브크래프트와 위어드 테일스 작가진들 간에 '서신'으로 대화가 이루어졌고, 그 이전에 에밀리 디킨슨과 같은 시인은 방 안에서만 시를 쓰다가 죽고 나서야 남편이 그 많은 시들을 추려내 공개가 된 시인입니다.

이 작품에서 언급하는 <대화>와는 다른 이야기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상한 말을 하는 건, 최근에 고민하던 주제기도 하고 – 그냥 방에 틀어박혀 있다가 갑자기 나오고 싶어졌기 때문입니다. 리뷰어로 써야 할 리뷰가 밀리긴 했는데, 사실 그냥 4주 남은 거 쓰지 말고 보상도 포기할까 하고 있었는데, 별안간 작가님이 작성한 큐레이션에 선정되어서요.

소설이건 리뷰건 뭘 쓰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뭘 쓰라고 요구받지도 않는 상황에서 퍼진 채로, 사랑니 뺀 후유증으로 널브러져 있다가 별안간 리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대화>라는 작품 자체를 줄거리로 요약한다면, 별 내용 없을 겁니다. 안드로이드와 소년의 여행과 교감, 그리고 갑작스런 환경의 변화로 끝나버리는 작품입니다. '서사'라고 불러야 하는지도 의문입니다. (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작가님이 더 잘 아시겠지요.) 장편 소설의 서사보다는 뮤직비디오의 서사 같은 느낌이랄까요.

그러나 불러일으키는 감정만큼은 확실합니다. 소통불가능한 두 존재의 소통 시도. 저는 <윌-E>를 본 적 없지만, 마치 무성 영화를 보는 느낌도 드는 게 저 영화 생각도 나네요. 서사적인 역동감보다는 정적인 서정성을 강하게 드러낸 작품이라는 점에서 레이 브래드버리 느낌도 나는 작품이었습니다. 가끔 시처럼 소설을 쓰시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요즘은 폄하되는 기법이 있습니다. '말하지 않고 드러내기'는 한때 소설의 기본 기법이었습니다. 헤밍웨이는 이를 '빙산 기법'으로 불렀다죠. 첫 문장을 쓰고, 부연적인 묘사를 한 다음에, 첫 문장을 지워버립니다. 어떤 면에서는 영국식 농담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런 걸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소설에서는요. 영상에서는 그래도 살아있습니다. 예를 들어 <존 윅> 보는데 존 윅이 일일이 기술명을 외치면서 액션을 취한다면 폼이 다 떨어질 겁니다.

물론 만화적 측면을 살리기 위해서 거꾸로 이 방향을 취할 수는 있는데 그건 아무래도 방향성 자체가 다른 거니까요.

아니다, 사실 영상에서도 그다지 살아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매체는 갈수록 숏폼을 내세우고, 아마 <존 윅>을 극장이 아니라 스마트폰 크기의 모바일 화면으로 본다면 <무한도전> 자막 정도는 띄워줘야 볼 수 있을 겁니다.

웹 연재 소설은 그 여파가 제일 심하죠. 사실상 소설이라는 매체가 절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나서 부활한 셈인데, 웹소설이 출판소설의 문법과 같을 리가 없습니다. 그냥, 당장 말하는 게 좋습니다. 묘사는 커녕 설명조차 귀찮습니다.

사실 그 점에서 무협은 서술전략이 효율적이죠. 한자어니까.

그럼 그렇게 해야 돈이 벌리고 독자를 얻을 수 있으니까 모든 작가가 그렇게 써야 하느냐구요.

사실 그 점에서 제가 한동안 방에 틀어박혔던 것 같습니다. 제가 쓴 <청춘 환상 검무곡>이 첫 작품 치고 썩 나쁘지 않았다고는 주변에 말하고 다닙니다만, 그래도 모자람은 많은 작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뭔가 콩고물이라도 떨어지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더라구요. 정작 취직은 커녕 아르바이트도 아직 못 구했는데, 관성은 이미 당겨진 채라 갑자기 멈춰서니 굴러떨어지는 게 많이 아팠습니다.

제일 괴로웠던 건 옆사람에 대한 질투였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근처 사람들은 이미 작가로서든 학자로서든 데뷔해서 잘 나가고 있는데, 하다 못해 일자리라도 있는데 저만 멈춰 서 있다고, 그러니까 멈추지 말고 계속 글이라도 써야 한다는 괴로움이요.

그 사람들이 '어떻게 써야 한다'고 하는 말들을 듣는 게 제일 기가 꺾이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네. '말하지 않고 드러내기'는 바쁜 세태에 맞지 않는, 비효율적이고 고리타분한 방식일지 모릅니다. 그래서요?

요즘은 수많은 컨텐츠를 쳐내는 시대입니다. 쳐낸다는 말에는 세 가지 의미가 복합되어 있습니다.

쳐 많이 쏟아내다 쳐 많이 읽어내다 쳐 많이 튕겨내다

사실 이거 아니었는데 전에 써놓은 게 있었는데 지워졌어요. 아무튼 간에 이런 세태에 글이나 쓴다는 건 그 쏟아지는 컨텐츠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일입니다. 컨텐츠를 보고나면 그래서요. TV에 나오는 모 유튜버 누군지 모른다고 가족한테 말했더니 '넌 평범한 사람들과 스몰 토크 거리가 없니?'하고 갈구더라구요.

컨텐츠 보는 것조차 노동이 되어버린 시대에 '돈도 안 되는' 창작을 한다는 건 한가로운 일입니다. 그래서요. 그 한가한 순간을 위해서 일하는 게 아니었던가요. 그 한가한 순간을 남들과 공유하기 위해, '대화'하기 위해 창작을 하는 게 아니었던가요.

적다 보니 <대화> 자체랑은 상관 없는 글이 되어버렸네요. 쉬다가 갑자기 글을 쓰면 또 이렇게 됩니다. 큐레이션에 <대화> 말고도 다른 작품도 읽었는데, 유쾌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저도 부담 없이 다시 글 쓸 수 있을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브릿G #문학 #소설 #리뷰 #감상문

<무명의 별>은 출간 전부터 제가 '각'을 보고 있었던 작품입니다. '이 작품 느낌이 꼭 출간될 것 같은데?' 뭐 이런 느낌이 강하게 왔거든요. 골드코인으로 전 회차 구매하기는 했지만, 저는 모바일 E북 독서에 익숙하지 않은데다 제 리더기는 브릿G를 지원하지 않아서 읽지 못하고 방치해 놓고 있었습니다.

이시우 작가님은 '저랑 파장이 맞는다'고 느끼는 작가입니다. 첫 작품 <이계리 판타지아>를 쓰신 후에, <장르의 장르>라는 인터뷰집에서 (여기서는 필명 '왼손'으로 참여하셨습니다.) '어반 판타지'에 대해 이야기하시는 걸 봤을 때, '통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점에서 <무명의 별>을 발견했을 때 꽤 반가웠습니다. 마침 그 때가 제가 <청춘 환상 검무곡>을 연재하던 중이었거든요. 첫 장편이자 어반 판타지였습니다. 어느 정도 무협적인 요소들을 차용하려고 노력한 흔적도 있었구요.

작품 내용은 간단합니다. 현대 서울 ~ 통영을 배경으로, 어쩌다가 과외 선생님께 무공을 배운 권별과 산중노인의 무기로 길러진 무명이 만나 통영을 뒤집어 엎는 이야기입니다. 조금 <아라한 장풍대작전> 같아요.

처음 <무명의 별> 읽었을 때만 해도 저는 반가웠습니다. 그도 그럴게 E북 독서가 안 되어서 못 읽었던 작품을 종이책으로 만나게 되었으니까요. 읽는 내내 '아. 이거 빨리 읽어야하는데. 너무 재밌는데.' 하고 하루종일 이 책 생각만 했습니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사실이 그러합니다. <과외활동>을 두고 좋은 소설이라 했던 게 기억이 납니다. 그 다음에 <이계리 판타지아>를 읽었었는데요. 사실 <이계리 판타지아>는 제대로 못 읽었습니다. 작품 자체에서 '훅 끌어당기는 게 없다'는 느낌과 ⋯ ⋯ . 황금가지 편집부에서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조판이 읽기 불편했습니다. 글씨 크기가 너무 작았어요. 그러나 <무명의 별>은 <이계리 판타지아>와 <과외활동>을 거쳐 굉장한 작품이 나왔다는 생각을 하게 해 줍니다. 현대 한국을 배경으로 온갖 무협 클리셰들을 재해석해서 먹여줍니다. 죽은 스승에 대한 복수와 자신의 (무림인적) 정체성을 고민하는 캐릭터가 있구요, 이 앞, 백합 있습니다. 한국 종이책인데 백합이 매우 찐합니다.

다 읽고 놀랐던 건 서술기법입니다. 이 책의 화자는 미래의 권별이 과거사를 이야기하듯 되어있습니다. 사실, 무협적인 작품을 쓰다 보면 제일 난처한 건 '액션씬'입니다. '필살기' 쓰자니 이름이 구리면 난처하고, '세밀한 동작 묘사'를 하자니 흐름 깨지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걸 '기억을 더듬어 쓰는 식'으로 하면, 액션을 더욱 생생하게 독자에게 들려줄 수 있습니다. 덕분에 다양한 무공을 가진 조연들 또한 돋보입니다. 신선객 같은 캐릭터가 제 취향입니다.

다 읽고 드는 감정은 ⋯ ⋯ . 솔직히 말할까요. 질투입니다. 제가 <청춘 환상 검무곡> 쓸 때 이 작품을 발견했다고 했지요. 그때 안 읽어두길 잘했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품이 제가 지향했던 바와 굉장히 비슷합니다. 주인공으로 귀여운 여자애들 나와서, 무공으로 다같이 싸우고, 밥먹고, 놀고. 이 패턴을 반복하는 것. 어찌 보면 비슷한 주제의 두 작품인데, (출간연도로 세어서) <이계리 판타지아>가 7년 전 소설이니 8년차 작가님과 저의 수준 차이를 엿본 것 같달까요. '이걸 반도 못 따라가면서 작가 씩이나 되려고 했단 말이냐?'

그래도 질투를 조용히 쳐다보고 있으면, 속삭임이 들려옵니다. '그래서, 안 할 거냐?'는 거죠. 그럼 욕 한 번 뱉어주고 훌훌 털고 일어서야겠죠. 자기연민으로는 아무것도 못하니까. 생각해보면 무협은 대체로 그런 내용입니다. 떨쳐 일어서기 위해 무를 배우고, 나아가기 위해 협을 깨닫는.

#리뷰 #감상문 #소설 #문학

소설에 있어 장르란 주제이자 질문입니다. 작가가 어느 '장르'를 선택하는 순간, 작품의 주제는 그 장르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로 소급됩니다. 특히나 그 장르가 고착화되고 단단한 장르라면요. 특히나 무협이 그렇습니다. 무협은 저에겐 여전히 단단한 장르로 여겨집니다. '무'에 해당하는 무술과 액션이 있어야 하고, 그 무를 통해 '협'을 실천하는 장면들이 필요합니다. 이 과정에서 작가가 필연적으로 대답해야 하는 질문은 '무엇이 협이냐'는 겁니다. 칼을 휘둘렀으면 뜻이 있어야겠지요. 그 뜻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칼까지 휘둘러야 합니까? 협은 그 합리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 협이 작가는 물론이고 독자까지 납득시킬 수 있게 되면, 사람들은 그 협을 휘두르고 다니는 사람을 '협객'이라 부를 겁니다.

무협에 비하면야, 판타지는 자유로운 장르라 할 수는 있겠습니다. 그저 '환상'만 존재한다면야 판타지는 판타지입니다. 신화적인 존재나 마법이 등장하지 않아도 판타지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런 존재들을 대놓고 등장시킨다 하더라도 '신비성이 떨어진다'고 욕하는 '판타지 대법관'따위 없습니다. 모 친구는 그런 점에서 <베테랑 2>는 판타지 아니냐고 하더라구요. 서울 한복판 폐건물에서 도박판이 벌어지고, 어딘가엔 마약굴이 있고, 자경단과 정의구현 유튜버가 있는 곳. 완전 판타지 아니냐는 겁니다. 물론 '매대'에 이런 걸 '판타지'라고 올렸다가는 큰일나겠으나, 저는 또 틀린 말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판타지의 환상은 자유로운 만큼이나 그 '환상'이 무엇인지 작가가 정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치 협객 안에 내재된 '협'이 무엇인지 독자에게 (이야기의 형식으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요. 환상의 형태는 다양합니다. 현실인지 환상인지 긴가민가한 내용을 환상이라고 한다면 '마술적 리얼리즘'의 형태로 불릴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검과 마법을 드러낸다면 '소드 앤 소서리'로, 어둡고 암울한 세계를 보여준다면 '그림다크', 동화스러운 세계를 보여준다면 '메르헨' ⋯ ⋯ . 네, 사실 말이야 전부 그냥 가져다 붙이기 나름입니다. 그러나 말이 존재한다는 것은, 요점을 정리해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 물론 그렇다고 요점만 가져다 붙이면 재미가 없죠. 그건 소설이 아니라 요점 정리니까요.

사실 판타지라는 것 자체가 '가상'을 만들어내고 향유하면서 발전했습니다. 루이스나 톨킨부터가 자기들의 영문학적, 신화학적 지식을 총동원해 '나니아'나 '레젠다리움' 세계관을 만들었으니까요. 그 다음에 잠시 등장했던 것도 '란크마르'라는 대도시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누군가는 실존하는 역사에 가상을 덧씌우기도 했죠. 그러니까, 결국 판타지라는 건 뭘 하든 판타지를 하고 생각하고 있다면 판타지입니다! 굉장히 DIY적이고 펑크한 사고방식이죠. 그러나 단 한 가지. 이것만큼은 늘 생각하게 될 거에요. 나는 어디에 있었는가? 그리고 앞으로 어디로 가게 될 것인가? 고작해야 학술적인 지식은 이런 '지도'를 만드는 데 많아야 3할 정도의 도움밖에 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자기만의 뭔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책을 통해서 답을 얻는 게 아니라 나가서 배워 얻어야 하는 것이니까요.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자기만이 알 수 있겠죠.

#문학 #에세이

브릿G 장편소설 <이룰루양카스의 딸>

처음 이끌린 것은 <블러드본>을 연상케 하는 제목과 소개글 때문이었을 겁니다. <블러드본>에는 '우주의 딸 이브리에타스'라는 보스가 존재하는데, '딸'이라는 표현과 '이'로 시작해 '스'로 끝나는 여섯 글자의 '신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헷갈린 듯 합니다. 게다가 '월귀'에 대한 언급까지. 그러나 실제로 '이룰루양카스'는 히타이트 신화에서 등장하는 환수라고 하는군요. 이 소설은 그렇다면 히타이트 신화를 소재로 한 작품일까. 글쎄요. 여기에 대해서는 있다가 이야기합시다.

RPG 게임에서 '소환'이라는 개념이 밀려난 지는 꽤 오래되었습니다. 이는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엔 대여점 게임 판타지 소설에서도 '정령사' 내지는 '소환사'라는 존재를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만, 이제는 '환상의 무언가를 소환하는 직업'은 주류에서 밀려난 듯 합니다. <이룰루양카스의 딸>은 요즘은 국내 판타지계에서 쓰이지 않는 듯한 '소환사'와 '환수'를 주제로 한 소설입니다. '백악나무'와 '황도'의 적인 '월귀'가 등장하는 등, 작품의 전반적인 배경은 <다크 소울>, <블러드본>이나 <엘든 링> 같은 '프롬 소프트웨어'의 게임들을 참조한 듯한 느낌입니다.

그 점에서 앞부분만 조금 들춰보았을 때, 처음 생각한 단어는 '그림다크(Grimdark)'가 아닌가 하는 의아함이었습니다. '그림다크'는 말 그대로 어둡고 암울한 세계를 다룬 판타지 소설입니다. <워해머> 시리즈나 <왕좌의 게임>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의미 없이 죽어나가고, 폭력적인 장면이 난무하는 작품군 말입니다. 그러나 읽을 수록 그것도 딱히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얌 말도고 다른 여성 캐릭터가 여럿 나하르 주변에 등장할 때 느꼈습니다. 아, 라이트노벨이구나. 그것도 이 스타일은 한 80년대 ~ 90년대 스타일에 가깝구나. 네, <슬레이어즈>나 <로도스도 전기>. 그런데 사실 저는 그 두 작품은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도록 하죠. <드래곤 라자> 닮았다고. 세계관은 '프롬 소프트웨어'의 작품들을 닮은 '다크 판타지'고, 캐릭터의 티키타카는 <드래곤 라자>를 닮았습니다. 소환사와 환수의 이야기는 꽤 옛날 스타일입니다. 세계관은 상당히 새로운데, 작품의 성향은 많이 올드합니다.

그러나 이 올드함은 어떤 의미에서는 기획된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수많은 '신화'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강'인 나하르와 '바다'인 얌. 고대 신화에서 얌과 나하르는 '혼돈의 상징'이라고 하네요. 그 외에도 '황도 12궁'이나 오딘 등 '세상에 존재하는 신화적 존재들의 이름'을 다 끌어모아서 '키친 싱크(Kitchen Sink)'에 가까울 정도로('키친 싱크'는 기법의 이름입니다. 주방 붙박이 빼고 다 끌어모았다는 뜻이지요.) 나열한 다음 중요한 역할을 부여합니다. 이는 특히 '환수'를 다룰 때 그러합니다. 이프리트, 골렘 등 이미 우리에게는 익숙한 이름들이 등장합니다. 왜 굳이 그랬을까요? 굳이 설정 페이지를 따로 마련하신 걸 보면 정답은 의외로 간단할 지도 몰라요. 일곱 용과 일곱 속성. 환수 간에 '상성'이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작품은 '놀이'의 감각으로 쓰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점에서 아쉬운 점이 있어요. 좀 더 작정하고 '놀았으면' 좀 더 재밌지 않았을까. 주인공의 여정과 성장에 집중하는 것보다 좀 더 환수들이 날뛰는 소설이 되었으면 어땠을까, 더 재밌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없진 않습니다. 그러나 <이룰루양카스의 딸>은 지금도 충분히 재밌는 작품이라는 말도 덧붙이고 싶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는 '재밌어지려는 단계'를 밟아나가는 작품이요. 2부가 기대되는 작품입니다.

#브릿G #문학 #소설 #감상문 #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