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새로 읽기를 멈추는 순간이 필요할 때
'읽기'는 여기서는 많은 걸 포괄하는 단어입니다. 굳이 서적뿐만 아니라 영화, 게임과 같은 종합 미디어나 심지어는 음악마저도 포괄하기도 합니다. 요즘은 미디어가 마구 쏟아지는 시대죠.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미디어를 읽어내기를 강요받습니다. 이번 주 넷플릭스 신작, 어떤 아티스트 신보, 너무 많이 보다 보면 결국 '뭘 볼까' 결정하는 단계에서 '로튼 토마토'나 '메타크리틱'같은 '비평가' 내지는 '큐레이터'에게 사고를 외주 주기도 하고, 뭐 그렇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고 쌩으로 부딪혀보는 사람도 존재하지요. 많이 읽다가도 불현듯 읽기를 멈추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유야 다양합니다. '읽을 여유가 없어서'가 대표적일 겁니다. '재미가 없어져서'도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취향이 있습니다만, 가끔은 취향이 사람을 잡아먹는 일도 존재합니다. “너는 SF를 좋아하니까, 이번에 나온 넷플릭스 신작 영화를 꼭 봐야 해. 그게 너를 구성하니까.”
어느 순간부터 '취향'은 일이 되어 사람을 갉아먹어요. 누구나 미디어를 감상할 때 취향 하나 쯤은 있습니다. “이 사람은 '호러'를 좋아하고, 저 사람은 '무협'을 좋아하니까 나도 하나쯤은 뭐가 있어야 한다.” 잘 갈고 닦아진 취향은 그게 없는 사람들이 보기에 멋있습니다. 질투가 날 정도죠. 그 결과 우리의 '라이오스 짤'은 무한정 확대 재생산되기에 이릅니다. “진짜 '드래곤 마니아'들을 보면 ⋯ 내 어중간함에 신물이 나 ⋯ !” 미친듯이 많이 읽는 게 장땡이라고 생각하던 순간이 저도 물론 있었습니다. 10대 ~ 20대 초 쯤은 '취향을 형성하는' 기간이라고 누가 말하더라구요. 한국 판타지 씬에서는 이영도에서부터 시작해서, 그 시절 신전기 라이트 노벨,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이 번역된다고 해서 3권까지도 읽어보고, 국내에는 없는 작품까지 읽어보려고 <디스크월드>의 야경꾼들을 다룬 파트나 아이튠즈 미국 계정까지 만들어 영상물을 구매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많이 보려고 한 이유라면 그야, 저는 그때는 '작가'를 할 거라고 굳게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한쪽에서는 무엇으로 먹고 살건 간에 다른 한 쪽에서는 '문필가'로 살 겁니다. 그건 그만두고 싶다고 그만둘 수 있는 건 아닐 거구요.
많이 본 걸 후회하는 건 아닙니다. 그땐 '컨텐츠'가 쏟아지는 속도가 지금같지 않았습니다. 물론 저야 과욕을 하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는 감당해 낼 체력이 되었습니다. 구매한 컨텐츠가 100이라 치면 거기서 할인이 반은 들어갔고 그 중 반은 읽었으니 남는 장사라 이겁니다. 근데 어느 순간부터 그게 '안 먹어지는' 순간이 옵니다. 사놓은 건 유통기한이 다 되어서 차마 못 보겠고, 새걸 사자니 구매할 여유도 사고 나서 읽을 여유도 안되는, 그런 순간이 옵니다. 보통 그때쯤 먼저 깨닫는 건 '내 취향의 작품을 모두 다 먹어볼 필요는 없다'는 걸 겁니다. <카우보이 비밥>이 전설적인 작품이라고 해서 모두가 그걸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야 <카우보이 비밥>은 그 세대 사람들이 그 세대에 맞는 방식 – 주 1회 24회 분량 – 으로 보았기 때문에 전설적인 것이지, 지금 세대 사람들이 굳이 <카우보이 비밥> 24화를 하루종일 몰아본다고 그때만큼 재미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요즘 느끼는 건, '취향을 다듬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남의 취향이 부럽다고 새로운 취향을 추가하거나, 무리하게 확장하는' 게 아니라 말이죠. 한동안 '남의 취향'을 질투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야 잘 다듬어진 취향은 그 사람의 '세계'니까요. 다른 사람들의 세계가 넓고 잘 다듬어진 걸 보면서, 왜 나는 저만큼 못 따라가나, 저런 세계 속에서 살아갈 수 없나 하면서 소외감을 느끼는 때가 있습니다. 사실은 지금도 조금은 그래요. 그때 필요한 건, 잠깐 뒤돌아보는 겁니다. 여태껏 뭘 읽어왔나, 어떤 세계를 봐왔나 하구요. 그러다 보면 불현듯 깨닫는 순간이 옵니다. 나는 먼 길을 왔고, 그 사람들과 방향이 달랐을 뿐이구나.
그래서 요즘은 예전에 읽었던 작품을 다시금 읽어보고 있습니다. <듀라라라!!>나 <마법사의 신부>라던가, 아니면 <존 윅> 시리즈 같은 것도 좋았구요. 마음같아서는 예전에 읽었던 <디스크월드> 원서를 읽어보고 싶은데, 영어 실력이 떨어졌을 게 뻔해서 읽는 게 무섭습니다. 더 어릴 때 취향으로 건너가서 <셜록 홈스의 모험>도 좋구요. 이렇게 되짚어가다보면, 슬슬 누군가 말 거는 목소리가 들려 옵니다. 그건 아마 아직 태어나지 않은 소설 속 인물들의 목소리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