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강 | MuKang

생각하고, 읽고, 그리고, 쓰고 가끔 차나 커피를 마십니다.

자유 음악 웹진 TuneFragments에서 읽기

회색과 음악. 음악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색채 이야기를 꺼내는 건 안 와닿을 수 있겠다. 음악은 기본적으로 청각적 예술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누군가 청각 자체가 고막의 떨림을 통해 전해지는 예술이라고 주장을 한다면, 촉각까지는 그 감각을 연장시킬 수도 있으리라. 음악을 진정 좋아하는 사람 중에 음악을 듣다 '전율'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므로. 가사에서 문학성을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사를 들을 때의 이야기고, 뇌과학자들은 뇌파 이야기를 하지만 나는 거기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회색과 음악이다. 음악에서 색채라니. 공감각적 심상이라도 이야기할 셈인가. “푸른 종소리” “금빛 게으른 울음” 뭐 이런 교과서 시에서 나올 법한 표현들. 이 범주가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글쎄, 그렇게까지 큰 연관을 가지고 생각한 건 아니다.

내가 말하려는 건 조금 더 단순한 개념이다. 나는 음악을 들을 때 음반 단위로 듣는다. 30분 정도면 짧은 편이고, 50분이 넘어가면 너무 길며 40분에서 45분 내외가 딱 적당하다. 주로 영미권의 음악을 듣는 편이지만 (가끔 철이 돌아올 때마다 한국과 일본의 음악을 듣긴 한다) 장르는 크게 가리진 않는다. 락과 힙합 팬덤이 서로에게 눈알을 부라리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건 나와는 너무나도 상관없는 이야기다.

음반 선택의 지표로서 내 눈길을 끄는 건 몇 안된다. 그 중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은 음반의 커버, 혹은 재킷이라고 불리는 사각형의 사진 혹은 일러스트다. 나는 그 정사각형이 주는 느낌에 집요하게 집착한다.

 

어떻게 보면 정말로 앨범 커버는 필요없는 요소다. 총기가 가득하던 시절의 칸예 웨스트는 <Yeezus>를 발매할 때 아예 '앨범 커버'라는 개념을 빼고 음반을 발매한 적이 있다. '음악만으로 평가받겠다는 심리'를 이해못하는 건 아니다. 이젠 정말로 '음반', 정확히는 'LP'나 'CD' 혹은 '카세트 테이프'라는 '물성'에 기댈 필요가 없는 시대가 왔으니까.

이제 우리는 스트리밍을 통해 음악을 듣는 수준이 아니라, 유튜브를 통해 인디 아티스트의 신곡을 듣는다. Vylet Pony나 Louis Zong 혹은 Nobonoko 등은 자신의 채널에 싱글을 공개한다. 생각해보면 이 분야에서는 Microblank가 먼저였던 것 같기도 하다.

물성에 기대는 시대는 끝난 것처럼 보이고, '앨범 커버'라는 것도 이제 그 개념을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물론 각 아티스트들이 음원을 공개할 때 '썸네일'을 필요로 하는 것도 있으니 '앨범 커버'라는 게 사라질 일은 없을 것이다. 어쩌면 애플 뮤직이 '움직이는 앨범 커버' 시스템을 도입한 것도, 그런 '디지털함'을 반영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음반을 기억할 때 선율 다음으로 그 표지를 먼저 떠올린다. 그것의 '정확한 제목'이 무엇이었는지, 누구의 '정규 몇 집'이었는지는 그 다음에 떠오른다. 내 머릿속에서 음반의 '선율'과 '커버'는 하나로 이어져 있다.

이를테면 자기 사진을 떡하니 음반에 싣는 부류들이 있다. 가끔은 음악에 비해 사진 나온 게 촌스러워서 다른 커버로 바꿨으면 싶을 때도 있다. 잭 화이트나 노엘 갤러거의 솔로 음반이라거나, 주로 블루스 아티스트들이 그렇다. 몇몇 힙합 아티스트들도 그러는 편이다.

나는 그들을 이해한다. 그들에게 '음악'은 '자신의 음악'이므로. 음악을 해오며 형성한 에고가 스스로를 만들고, 그 스스로를 커버에 드러내는 것 뿐이므로. 그리고 커버가 실린 음반은 다시 자기 자신의 서사로 돌아온다. 완벽한 자신으로의 귀결이 아닌가?

사이키델릭 아티스트들은 조금 이해할 수 없는 초현실적인 총천연색의 색채를 싣는 편이다. 스토너나 둠 메탈을 보여주는 아티스트들은 거칠고 악마적인 색채를 커버에 담아낸다.

 

그리고, 돌고 돌아서 다시 회색이다. 내가 본격적으로 음반을 듣기 시작한 건 라디오헤드가 9집 <A Moon Shaped Pool>을 내고 길고 긴 침묵으로 돌아서기 전의 일이다. '달 모양의 연못'이라는 제목과, 심연으로 빠져드는 듯한 회색 소용돌이의 표지. 그때 라디오헤드가 보여줬던 음색은 직전 음반 <King of the Limbs>의 조용한 전자음에 영화적인 현악이 더해진 섬세한 선율이었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떤 저항감도 없이 심연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느낌. 폴 토마스 앤더슨이 감독한 <Daydreaming>의 뮤직비디오처럼, 어디론가 자꾸만 문을 열고 깊숙한 곳으로 내려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음반의 마지막 트랙인 <True Love Waits>는 미발표곡 상태로도 굉장히 자주 들었던 음악인데, 그 곡에 다다라서 나는 내가 찾던 무언가가 사랑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상태로 라디오헤드는 멈춰버렸다. 이따금 톰 요크나 에드 그린우드 등이 개인 활동을 하고, The Smile을 결성해 정규 음반을 3개나 발매했지만 그들은 중요한 때 중요한 과제에 침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뭣보다, 새로운 노래들은 <A Moon Shaped Pool>과는 달랐다. 그것들은 '회색'이 아니었으므로.

 

회색만을 엄청나게 찾아다닌 건 아니었다. 음악의 색채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부분도 많은데다, 음악의 색채가 꼭 회색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이를테면 화이트 스트라입스는 강렬한 빨강, 거기서 독립해 솔로 아티스트가 된 잭 화이트는 강렬한 파랑을 보여주는 편이다. 초기의 프란츠 퍼디난드는 강렬한 러시아 미술을 활용하고, 이에 반해 스트록스는 6번째 정규 음반 <A New Abnormal>에서 바스키야를 인용했다.

하지만 나는 어느 지점에서 항상 회색으로 돌아온다. 남의 빨간색이든 파란색이든 총천연색이든, 항상 그것은 내 퍼스널 컬러가 아니었다. 다양한 색채의 음반을 즐기다가도, 언제나 그것은 '내 음악은 아니다'라는 괴리감을 느끼는 것이다.

 

여타 다른 색이 그렇듯 회색은 다양한 음색을 담아낸다. 아마도 채도가 비어있는, 채도를 채워넣을 수 있는 색이기 때문일 것이다. Vampire Weekend는 <Modern Vampires of the City>에서 따뜻한 위로의 선율을 건넨다. 맥 밀러의 유고 음반인 <Circles>이나 데이먼 알반의 첫 솔로 음반은 <Everyday Robots> 유쾌하고 무기력한 스스로의 모습을 가감없이 드러내기 위해 회색의 색채를 사용한다.

회색은 힙합에서도 자주 쓰이는 음색이다. MF DOOM(무조건 대문자로 쓸 것)은 Madlib과 <Madvillainy>를 만들 때 회색을 사용했으며 Open Mike Eagle의 신보인 <Neigborhood Gods Unlimited>에서 회색을 사용했다. KA는 죽기 직전까지 회색의 단골 손님이었으며 켄드릭 라마까지도 회색을 벌써 두 번이나 사용했다.

그런가 하면 어떤 고딕하고 어두운 감정을 끌어내기 위해 사용하는 회색이 있다. PJ 하비, 닉 케이브 앤 배드 시드가 회색을 사용했으며 빌 에반스와 짐 홀도 <Undercurrent>에서 회색을 사용하지 않았던가.

 

회색 음반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무엇일까. 회색(Greyscale)은 흑백(Monochrome/Black & White)과도 다르다. 흑백은 차라리 선명함을 드러낸다. 대담함이고, 자신감이다. 검은색이 강렬한 만큼이나 하얀색 또한 그렇다.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은 스스로의 강렬함을 강하게 드러내기 위해 틱광둑의 흑백 사진을 활용했다.

회색은 흑백과는 꽤 닮았지만 다르다. 희뿌연 연기 속에서, 우리는 흐려진다. 흑백 논리를 거부하고 회색이 된 채, 이도저도 결정하지 못한 채 우리는 회색이 된다. 회색의 선율은 그런 흐린 우리 자체를 조명한다. 회색은 차라리 연약한 색채인 셈이다.

하지만 우리가 예술에, 선율에 바라는 것은 선명함 만큼이나 연약함과 모호함 아닌가. 회색의 선율이 가진, 자기고백에 가까운 우유부단함과 솔직함은 앨범의 표지를 경유해 우리에게 말한다. 괜찮다고.

끼앵끼앵풀 <이름> – 브릿G

TRPG 씬에는 유명한 농담이 있습니다. '엑스트라한테 이름 붙일 때 조심해라'는 농담인데 정말 겪어 본 사람만 압니다. 지나가던 단역 A인데 지칭어가 필요해서 '이름'을 부여했더니 생명력을 가지고 아득바득 엔딩까지 플레이어들과 동행하는 그 경험을 말이죠.

역할놀이 엑스트라와 이름의 관계도 각별한데, 소설 주인공과 이름의 관계도 그러하지 않을 리 없죠. 기구한 팔자나 성격의 캐릭터들은 저마다 특별한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평범하다면, 의도된 평범함(이름)과 특별함(그 캐릭터만이 가지는 과장된 특징)이 조화를 이루는 상태일 거구요.

만약 인용을 하게 되면 (이를테면 <오디세이아> 등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인용하는 수많은 작품들) 그 캐릭터는 인용된 대로의 삶을 살게 될테고, 의도적으로 비워놓는다면 그만큼이나 많은 의미를 가지게 될 겁니다.

제가 소설을 쓸때도 이름 관련으로는 웬만해선 조심하는 편입니다. 저같은 경우엔 최대한 의미를 담아내려 했었습니다. 이를테면 제가 <청춘 환상 검무곡>에서 썼던 주인공들 이름인 하양, 산새, 달래, 모란에는 제각기 모티브가 있었지만 솔직히 잘 살아나진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그 친구들은 제 이름대로는 산 것 같네요. 정확히는 이름이 주는 '느낌'대로요.

끼앵끼앵풀님의 작품 <이름>을 이야기하기 전에 뜬금 없는 잡소리부터 먼저 한 이유는, '이름'이라는 개념이 지닌 독특한 성격이 작품을 지배하기 때문일 겁니다. 이름은 날 때부터 타인에 의해 결정됩니다. 꼭 사람이 제 이름만큼의 삶을 산다는 보장은 없지만 매 순간 제 지칭어로 듣고 사는 것이 이름인데 그 존재감을 무시하고 살 수는 없을 겁니다.

이름 없는 소녀의 '카르마'로 얽힌 연자죄는 소녀의 상냥함을 무시하고 자꾸만 그녀를 가혹한 상황으로 몰아갑니다. 소사는 '파르바예'라는 가문의 이름에 짓눌려 스스로를 얽매어갑니다.

이름을 갈구하는 용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용'이 아니고 '용괴'인 이유는, 이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름이 없기 때문에 자아의 닻을 내리지 못하는 존재들. 어찌 보면 소사의 입장에서 그들이 괴물인 이유도, 전쟁병기에 불과한 이유도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름의 존재는 죄로 얽히고, 부재는 자아의 형성을 뭉개버립니다. 굴레는 자꾸만 얽혀갑니다. '이름'을, 스스로 살아갈 팔자를 결정할 수 없는 기구함은 읽는 사람의 감정을 슬픔으로 몰아넣습니다. 네, 그래서 소녀는 슬픈 거에요.

세밀한 묘사의 부재가 아쉬울 수는 있겠습니다. 이를테면 저는 생생한 묘사의 현장감이나, 혹은 따로 1인칭 시점을 설정해서 주절대는 것을 (혹은 둘 다를) 굉장히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저라는 독자 개인의 취향일 뿐입니다.

그러나 전투 장면의 묘사만큼은 꽤 박력이 있었고, 별 생각 없이 클릭한 작품에서 예상치 못한 서정성을 느꼈다는 점이 굉장히 매력으로 다가왔달까요. 끼앵끼앵풀 님의 <이름>은 좋은 황금 연휴 선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더 다크니스 2>는 이미 끝낸 지 작성일로부터 2주가 넘었습니다. 약 5시간에 달하는 짧은 플레이타임이었지만 상당히 재미있었습니다. 하지만 굳이 '일일이 감상을 남겨야 할까?'하는 의문에 굳이 감상을 남기지는 않았어요. 워낙에 단순한 게임이었으니까요.

스토리는 단순합니다. 악마 '다크니스'에게 빙의된 마피아 도련님인 재키가 '다크니스'를 노리는 '형제단'에게 공격당합니다. '형제단'의 습격에 재키가 복수하고, '다크니스' 안에 사로잡힌 자신의 연인인 제니를 구하는 내용입니다.

레벨은 레일로드로 진행됩니다. <더 다크니스 2>는 2012년 게임이고, 레일로드 슈터의 대표격인 <콜 오브 듀티 4 : 모던 워페어>가 2007년에 발매된 것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 있겠습니다.

이런 기본적인 '레일로드 슈터'의 런앤건 감각에 주인공에 빙의된 악마 '다크니스'의 각종 다양한 능력과 그 능력을 제한하려는 적들을 더해 높은 액션성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저는 '부머 슈터'라는 장르를 굳이 찾아 플레이하진 않습니다만, 꽤나 원초적인 형태의 '부머 슈터'가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습니다.

앞서 말했듯 <더 다크니스 2>는 5시간 남짓의 매우 짧은 플레이타임을 가지고 있고, 눈 앞에 보이는 적들을 다 쓸어버리는 매우 액션성 짙은 레일로드 슈터입니다. 물론 액션 FPS 게임으로서의 레벨 디자인은 훌륭합니다만, 굳이 이걸 감상으로 남겨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원래는 감상을 쓰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럼에도 감상을 쓰려는 것은 일단은 미결을 남기고 싶지 않아서가 하나이고, 나머지 하나는 <더 다크니스 2>가 제가 원하는 '어반 판타지'의 감각을 잘 녹여내고 있다는 점에서입니다.

<더 다크니스 2>는 Top Cow Productions, 현재는 Image Comics에서 판권을 보유하고 있는 만화책 시리즈를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만화책 시리즈는 90년대에 연재되었습니다.

90년대 픽션 씬은 어반 판타지의 황금기였어요. <샌드맨>이나 <헬블레이저> 같은 버티고의 간판 타이틀이 여기에 연재되었습니다. <버피 더 뱀파이어 슬레이어>와 그 외전 <엔젤>이 인기 드라마였고, <월드 오브 다크니스>와 같은 테이블탑 RPG까지 등장할 정도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익스트림(꼭 Extreme이 아니라 Xtreme으로 써야 합니다!) 열풍으로 과장된 근육과 유혈 묘사가 두드러지던 시기였습니다. <더 다크니스> 원작을 본 적은 없지만, 원작 만화는 어반 판타지와 익스트림 사이에서 꽤나 걸출한 컬트적 인기를 누린 것으로 추측됩니다.

<더 다크니스 2>는 카툰렌더링 그래픽을 기반으로 폭력적인 액션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액션 슈터입니다. 그러나 그 배경은 (적어도 미국인에게는) 친숙한 도시의 변두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레스토랑, 호텔, 창고, 혹은 정체불명의 매음굴이나 폐 놀이공원 같은 곳 말입니다.

적들인 '형제단'을 이끄는 악당인 '빅터'는 근래 본 악당들 중 가장 매력적인 악당들 중 하나였습니다. 물론 캐릭터의 동기야 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크니스를 빼앗아 그 힘으로 어쩌구 저쩌구 ⋯ ⋯ .'

하지만 빅터의 중요한 점은 그게 아닙니다. 빅터는 굉장히 지능적인 악당이며, 주인공인 재키보다 언제나 한 발짝 앞서가 있습니다. 빅터는 최종 대결에 이르기까지 무결점에 가까운 수준으로 재키를 농락하며, 때문에 빅터의 성격은 평면적임에도 상당히 강렬한 악당으로 다가옵니다.

마지막으로 역시 <더 다크니스 2>의 장점은, 단순히 '런앤건 FPS'가 전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언제든지 재키는 촉수를 휘두를 수 있고, 적을 휘감아 강력하고 잔혹한 공격을 퍼부을 수 있습니다. 물건을 집어던지고, 역병을 퍼뜨려 혼란을 일으키기도 하며, 심지어 무기를 강화하고 갑주를 입을 수 있습니다. 적들의 시체 가운데에 발생한 블랙홀을 집어던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재키에 대응하는 적들 또한 다양한 전술을 활용합니다. 재키의 '다크니스'와 관련된 능력들은 '빛' 아래에선 무용지물이기 때문에, 적은 광선을 재키에게 내리쬐려 합니다. 섬광탄을 던지고, 심지어 방패로 공격을 막거나 사슬을 휘둘러 무기를 가로채기도 합니다.

플레이타임은 상당히 짧습니다. 저는 5시간도 되지 않아 결말을 보았으니까요. 하지만 이미 고전게임이 되어버린 지금, 그리고 이런 '어반 판타지' 배경의 게임을 찾기 힘든 지금 <더 다크니스 2>는 한번쯤 저렴하게 구해서 플레이해볼 만한 괜찮은 게임입니다.

“도시의 이름은 '헬사렘즈 로트', 한때는 뉴욕. 하룻밤 만에 붕괴와 재구성을 거쳐 이차원의 경계가 된 도시는 지금 ⋯ ⋯ . 이계와 인접한 경계점, 지구상에서 가장 험악한 긴장지대로 변했다.

안개로 흐릿해진 도시에 꿈틀되는 암흑과학, 초상생체, 마도범죄. 한 걸음 잘못 디디면 현세는 침식당해 거스를 수 없는 혼돈에 삼켜지고 만다.

세계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암약하는 비밀결사 라이브라. 이 이야기는 그 구성원들의 싸움과 일상을 기록한 것이다.”

참으로 간결한 설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매 화를 시작할 때마다 나오는 이 짧은 문구야말로 이 작품의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이번에 읽은 작품은 <혈계전선> 원작 만화책 시즌 1입니다. 총 단행본 10권 분량으로 이 시즌 1의 내용을 기반으로 애니메이션 <혈계전선>의 시즌 1, 2가 만들어졌습니다. (단, 시즌 1의 '화이트'와 '블루' 시나리오는 애니메이션 오리지널입니다.)

<혈계전선>의 구조는 단순합니다. 쳐다보기만 해도 복잡하게 생긴 도시가 존재하고, 거기서 수없이 많은 일들이 벌어집니다. 당연히 거기에는 세계를 위협할 만한 일도 벌어집니다. 거기서 라이브라가 등장합니다. 라이브라의 활약 끝에 한 차례 위기는 끝납니다.

그러나 <혈계전선>은 일종의 픽스-업 단편 연작입니다. 세계와 캐릭터를 고정한 채 그 안에서 비슷한 플롯의 다른 내용들을 반복합니다. <미션 임파서블>을 짧은 템포로 반복하는 것이죠. 이 반복이 시즌 1의 전체적인 흐름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깔끔하지는 않을지언정 <혈계전선>은 난잡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혈계전선>의 플롯 구조는 정말로 푸가처럼 뚜렷한 테마를 지니고 주제부를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변화하는 도시와 사람을 짓뭉개는 커다란 사건과 사고들, 그럼에도 거기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혈계전선>은 제가 단언코 좋아하는 작품을 고를 때 가장 빠르게 생각나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어떤 점이 좋으냐 하면 글쎄요, 생각하기 힘듭니다. 좋아하는 점은 많습니다만, 딱 잘라 어디가 좋다 하기 힘든 총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은 총제적입니다. 물론 이 작품 안에 '최애캐'가 존재할 수는 있겠죠. 이 작품은 캐릭터가 백미인 작품이니까요. 제프라는 캐릭터를 좋아한다고 합시다. 이 캐릭터는 인간말종 난봉꾼입니다. 하지만 이 캐릭터는 독자적으로 난봉꾼이 아닙니다. 이 캐릭터를 제어하는 캐릭터(체인, 레오)가 있고, 라이벌이자 동료(제드)가 있으며, 그가 일하는 결사(라이브라)가 있습니다. 라이브라를 통해 그는 '헬사렘즈 로트'라는 세계와 관계를 맺고, 거기서 활약을 해 도시를 구합니다.

그러나 '헬사렘즈 로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시시콜콜합니다. 세계 정세가 왔다갔다한다는데 '시시콜콜하다'는 표현은 꽤나 맞지 않다 생각하실 수도 있으나, 저는 시시콜콜하게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헬사렘즈 로트'에는 이미 너무 많은 위기가 있고, 그럼에도 그걸 받아들이는 등장인물들의 태도가 시시콜콜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캐릭터 – 조직 – 세계 간의 사이가 굉장히 유기적입니다. 그리고 다양합니다. 라이브라만 해도 일곱이 넘는 개성적인 캐릭터가 있습니다. 디자인이 요즘의 가챠 게임들처럼 '과도하게' 개성적이지는 않습니다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만화책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어울립니다.

컷을 배치하는 실력도 남다릅니다. 만화책을 보신다면 대다수 컷에 배경이 생략되신 걸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심지어 도시의 풍경을 그릴 때에도 대다수의 배경은 안개 톤에 가려져 있습니다. 캐릭터 디자인이 부드럽고, 배경도 생략된 덕에 만화책을 읽는 동안 우리는 빠른 속도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속도감을 가속해가며 작가인 나이토 야스히로는 하이라이트에 이르러 맞쪽의 스플래시 아트, 그리고 필살기 이름 등으로 사건을 끝내는 기법을 자주 활용합니다.

그럼에도 질리지 않는 건, <혈계전선>의 '헬사렘즈 로트'라는 배경은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고, 거기다가 어떤 상상의 사건, 배경, 인물을 집어넣든 말이 되기 때문일 겁니다.

이렇게 좋아하는 점이 많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혈계전선>이 좋은 점을 딱 잘라 말해볼까요. 역시나 이 작품은 도시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개인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배틀물이 주류인 일본 만화들 사이에서, <혈계전선>은 다른 전략을 취하고 있습니다. 캐릭터들 간의 일상과 액션을 단편 연작으로 다루는 것입니다. 이 짧은 단편의 연속 안에서 캐릭터들은 사람을 압도하는 도시 앞에서 살아남고자 고군분투합니다. 그런 하루하루의 싸움이 일상이 됩니다. 그리고 그 일상이야말로 얻어낼 가치가 있는 것이죠.

<혈계전선>은 세계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암약하는 비밀결사 라이브라, 그 구성원들의 싸움과 일상을 기록한 것입니다.

하루가 영원히 반복됩니다. 루프가 이루어지는 섬에 갇힌 사람들이 그 루프가 반복된다는 사실을 축하하며 첫날을 보냅니다. 그 루프가 반복된 지 까마득하게 오래되었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린 채 말이죠.

콜트는 루프가 이루어지는 블랙리프 섬의 해변에서 아침에 눈을 뜹니다. 그리고 자기가 이 망할 루프에 갇혔고, 이 루프를 탈출하기 위해서는 '선구자'라고 부르는 8명을 '하루' 안에 모두 죽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실패한다면 또다시 아침의 해변에서 눈을 뜰테죠.

이 8명의 선구자들(한 명은 일종의 '침입' 요소인데다, 결과적으로 엔딩까지 가야 마주할 수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론 7명입니다)을 '하루' 안에 죽이는 법을 발견하기 위해 섬을 탐사하고, 초능력을 얻고, 총기와 장비를 갈아끼우며 루프를 반복하는 게임. <데스루프>를 플레이했습니다. 클리어에는 장장 27시간이 걸렸습니다.

저는 <데스루프>가 나오기 전부터 기대를 굉장히 많이 했습니다. 아케인 스튜디오의 게임이니까요. <디스아너드>를 홀린듯이 플레이하고 호불호가 갈렸던 <프레이>마저도 감명깊게 한 저는 <데스루프> 또한 제가 바라지 마지않는 게임일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데스루프>는 거의 예구였던가 첫 할인 때 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금 하다가 방치했죠. 그러다가 잊어버릴 때 쯤 재설치해서 플레이하고, 그리고 지워버리고, 다시 잊기 전에 재설치해서 조금 하고, 지워버리고를 반복했습니다.

게임에 문제가 있냐구요? 네. <데스루프>에는 확실히 문제가 있습니다. <데스루프>는 상당히 밀도가 높은 게임입니다. 음악과 미술은 아케인 스튜디오답게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기존에 아케인 스튜디오에서 시도된 적 없는 6070스러운 레트로 Sci-Fi 요소들이 잘 어우러져 있습니다.

캐릭터도 상당히 마음에 듭니다. 콜트와 줄리아나는 매 임무의 도입마다 쉴 새 없이 입담을 주고받습니다. 각 선지자들의 개성도 확고합니다. 섬을 탐험해서 발견할 수 있는 요소들도 많습니다.

저는 잘 모르지만, 아케인 스튜디오는 <데스루프>를 발표할 때 '건슈팅'에 포인트를 맞추었다고 발표한 모양입니다. 실제로 <데스루프>는 캐주얼한 건슈팅 게임에 가깝습니다. 어느 정도 로그-라이트의 요소도 갖추고 있기 때문에 하루를 반복하며 여러 아이템을 파밍 가능하고. 다양한 빌드를 테스트해볼 수 있습니다.

레벨 디자인? 말할 것도 없죠. 아케인 스튜디오니까요. 하루를 네 시간으로 나눠 한 번 동안 4개의 맵 중 하나를 선택해 탐사하게 되는데, 반복성이 높음에도 그 밀도가 다릅니다. 건슈팅 위주지만 충분히 잠입 암살으로 해결할 수 있는 구간이 있고, 실력과 창의력이 더해진다면 여러 창발적인 방법으로 복잡한 레벨을 돌파할 수 있습니다.

문제가 있다고 했죠. 네, 문제가 있습니다. 분명 하나하나 다 따로 떼어서 보면 밀도가 높습니다. 하지만 이 요소들은 제각기 빽빽할 뿐 그 이음새는 헐겁게 끼워져 있습니다.

작품은 하루를 4번의 시간(아침, 정오, 오후, 저녁)으로 나눠 매 시간마다 섬의 네 장소 중 하나를 골라 탐사할 수 있게 해 두었습니다. 이 시스템을 이해시키기 위해 게임은 꽤 긴 시간을 할애하고, 반복되는 시간 동안 아이템을 리셋시키지 않고 유지시키는 방법을 가르쳐주기 위해 시간을 할애합니다. 그렇게 사실상 튜토리얼만으로 5시간이 지납니다.

5시간이 지나고 나면 플레이어가 하는 일이라고는 선구자들을 하루 모두에 죽이고 탈출할 방법을 발견할 때까지 장비를 갖추며 섬을 탐사하는 것 뿐입니다. 이걸 반복하는 데 적이 '과하게' 귀찮으면 안되겠죠. 결국 적당히 장비를 맞추면 대부분의 레벨은 돌파가 됩니다. 레벨 디자인의 밀도는 높지만, 거대한 게임 시스템과의 이음매가 헐거운 것이죠.

섬을 탈출하려면 섬을 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탐사의 지표는 처음부터 가시적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끽해야 선구자가 지금 어디에 있으며, 숨겨진 유니크 무기를 어디서 발견할 수 있는지 정도지요. 선구자는 분명 매력적인 캐릭터지만, 그들의 뒷이야기는 섬을 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유니크 무기'와 '선구자'가 아닌 다른 요소들은 지표 자체가 거의 제공되지 않습니다. 메모 한 줄을 줄 뿐이니 직접 끼워맞추는 수밖에 없지요.

<데스루프>는 이런 점에서 플레이어들에게 '껍질을 깨고 알맹이를 맛볼' 것을 반복해서 강요합니다. 각 요소들간의 연결이 헐거운 편이지요. 하지만 각 세부적인 요소들은 밀도가 높기 때문에, 게임을 켜기 전부터 피로감이 상당합니다. 아트나 음악, 스토리같은 미적인 요소와 로그-라이트 건슈팅 게임적인 요소, 어드벤처나 내러티브 요소를 한꺼번에 신경써야 하는 게임이기 때문입니다.

상당히 많은 요소를 결합하려 한 '실험작'인 셈입니다.

하지만 저는 <데스루프>를 꼭 깨야겠다고 마음먹었고, 루프를 끝냈습니다. 아케인 스튜디오 오스틴 지부가 폐업한 이상 이 게임을 꼭 끝까지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데스루프>가 가지는 문제는 뚜렷하지만, 이 문제는 게임사의 실험에 의해 빚어진 문제이며 한번쯤 겪어볼만한 골칫거리였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쉬었다가 다른 게임을 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