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카페 면접을 보러 다니면 꼭 듣는 소리가 있습니다. '전공이 커피가 아닌데 왜 갑자기 카페 아르바이트를 찾으시나요?'
그런 질문을 들을 만도 한 것이, 제 아르바이트 이력에 카페 이력이라고는 한 줄도 없고, 고작해야 '한국커피협회 바리스타 2급 자격증' 정도가 다입니다. 바리스타에게 있어서 중요한 건 고작 자격증보다야 경력사항인 바, 일할 사람을 뽑는 사장에게 있어서는 궁금할 만도 하겠죠.
보통은 '원래 작가 등 다른 일을 하다가 생업을 구하고 있다'하는 식으로 둘러대면 아~ 하고 넘어가주는 편입니다. 부산은 그래도 스스로를 '작가'라고 소개하면 '아우라'를 얻을 수 있는 환경이긴 합니다. 게다가 관련 대학의 관련 학과를 나왔으니, '음, 당연히 그렇겠군.' 하는 식으로 넘겨보낼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처음의 질문은 이런 의미도 내포하고 있을 겁니다. '어쩌다 커피를 좋아하게 되셨어요?' 그러게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은 맥심이나 카누 한 스틱 정도로 만족합니다. (다만 다른 곳에서 '맥심' '카누'를 초과하는 뭔가를 찾으려 하겠죠.) 그런데 왜 저는 굳이 커피를 좋아하게 되었을까요.
이렇게 분석할 수는 있겠습니다. '창작 또한 노동이고, 노동에 있어 카페인은 필수품이기 때문이다.'
맞는 말입니다. 저는 음료가 없으면 제대로 뭔가를 하지 못합니다. 커피든, 차든, 아니면 아예 허브티나 따뜻한 물이든 마실 게 있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게임은 커녕 인터넷 수다조차 제대로 못 떱니다.
어떤 연구자가 말하기를 '야, 글 쓰는 새끼들은 꼭 글 하나만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꼭 하나 더 해. 술을 하거나, 커피를 하거나, 향을 하거나 말이야.' 단순히 글을 쓰는 것 외에 고급 취향이 하나 더 있는 셈입니다.
오노레 드 발자크가 글을 쓸 때 커피를 줄창 마셔댄 일화는 유명합니다. 정 안 되면 커피 가루를 씹어대기도 했다고 해요. 그런가 하면 바흐는 커피를 소재로 '커피 칸타타'를 작곡했죠.
저는 커피 하면 생각나는 문인들은 늘 경성의 작가들입니다. 이상, 구보와 구인회들. 이상은 직접 근대기의 커피 가게라 할 수 있는 '다방'을 운영했죠. 그러나 경영 수완이 나빴기에, 다방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었던 개화기에도 사업을 여러 차례 말아먹고 맙니다.
저 말고도 다른 작가들도 뭔가를 마셔 댑니다. 누군가는 '일본의 작가들은 술, 담배, 커피를 셋 다 한꺼번에 해댔고 그 결과 미친듯이 창작을 할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헤밍웨이가 모히또와 다이키리를 좋아한 것은 마케팅을 위한 거짓말이지만, 그의 소설에 김릿이 등장하는 것 자체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업 도중에나 쉴 때 뭔가를 마신다는 건, 단순히 카페인 활성화도 있지만 저에겐 성찬식에 가까운 무언가이기도 합니다. 한 잔은 이상에게, 한 잔은 구보에게, 한 잔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에게.
물론, 이 모든 건 거짓말일지도 모릅니다. 그냥 아르바이트 구하다가 잠깐 생각난 것일지도 모르죠.
록은 죽었다고 다들 말하기는 합니다. 록의 저항 정신이 죽은 것인지, 음악성이 죽은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단순히 록을 좋아라 하는 사람들이 줄어든 것일지도 모르겠지요. 혹은 뭐만 하면 '예술의 종말' 타령 하는 사람들이 겁을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만 해도 록을 좋아하지 않는 게 사실입니다. 아, 싫어하는 건 아닙니다. 한때 좋아했었던 장르기도 하구요. 오아시스를 필두로 한 브릿팝이니, 너바나와 그런지니 뭐니를 이미 두 밴드의 전성기를 이삼십 년쯤 지난 때, 그것도 한국에서 이야기하기도 했던 걸요.
제가 좋아했던 록은 이미 '얼터너티브화'된 락이긴 합니다. 그 이전에는 '하드 록'이나 '헤비 메탈'이라고 레드 제플린이니 퀸이니 하는 밴드들이 커다란 곳에서 엄청난 솔로 연주를 선보이는 음악들을 했었죠. 저는 그런 걸 현장에서 본 적 없습니다. 부산 록 페스티벌도 한 두어 번 정도 간 게 다인 걸요.
요즘 사람들이 듣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아이돌 음악이나 전자 음악은 애니메이션 서브 컬처에 잘 파고들었습니다. 로우-파이 힙합 플레이리스트는 도시인의 수면제로 자리 잡았습니다. 음성 합성 엔진과 짧고 강렬한 선율로 숏폼에 잘 파고 든 음악들이 히트하기도 합니다.
이를 두고 '옛날의 음악'을 좋아하던 사람들은 '사람들이 그런 거나 듣다니 암울한 시대다' 하고 불평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앨범을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하게 정주행하던 시대가 갔다면서요.
저는 사실 조금 끼인 느낌입니다. 앨범 정주행, 합니다. 그러나 스트리밍으로 무제한 제공받은 탓인지, 앨범 정주행을 하면서도 앨범에 대한 경외감보다는 '앨범 시간'을 많이 봅니다.
앨범 길이가 45분 안팎이면 산책 한 바퀴 돌면서 듣기 최적입니다. EP가 대세가 된 지금은 훨씬 더 짧은 음반들이 많더라고요. 30분도 안 되는 음반이 많습니다. 더 짧은 거리를 이동할 때 듣기 좋겠지요.
이렇게 걸을 때 귀에 거는 이어폰이나 헤드폰이 그렇게까지 좋을 수는 없습니다. 좋은 건 집에 모셔놔야죠. 온이어 헤드폰을 끼고 걷거나, 카페에 앉으면 귀에 잡음이 섞여 듭니다.
보통은 그런 잡음이 싫어서 '노이즈 캔슬링'을 쓰시는 분도 있지만, 저는 그런 걸 쓸 형편이 되지 않아서 그냥 다닙니다.
그러면 귀에 제일 먼저 들어오는 건 뭘까요, 드럼입니다. 미묘한 박자감을 안겨주는, 드럼 말입니다.
드럼은 도시의 소음으로부터 사람을 지켜주는 부적이자, 도시를 즐기게 해주는 박자감입니다. 선율은 단순하더라도 괜찮습니다. 이미 도시는 고작 음악으로는 감출 수 없이 시끄러우니까요. 단순했던 도시의 소음은, 느리고 침착한 드럼 루프를 만나 힙합의 랩과 같은 선율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은 과거의 90년대 얼터너티브 록보다는 좀 더 박자감 있는 음악들을 많이 듣습니다. 재즈 붐뱁이나 로 파이 힙합이 좋습니다. R&B와 소울은 힙합의 사촌이라, 그 느린 박자감이 좋습니다.
록을 듣더라도, 블루스 성향이 짙은 록은 록이라기보다는 로큰롤 같아서 강렬한 그루브를 선사합니다. 아니면 챔버 팝 같은 실내 현악을 사용하는 것도 좋아요. 현대적인 그루브와 만나서 도시의 소음으로부터 피할 공간을 만들어주는 느낌입니다.
전자음악을 듣지 않는 건 아닙니다. 90년대에 등장했던 트립 합이나 정글, 브레이크비트는 현대 힙합의 대선배지요. 다만 신스웨이브는 밤이 아니면 못 듣겠습니다. 이 동네는 네온사인이 많이 없거든요.
처음 이끌린 것은 <블러드본>을 연상케 하는 제목과 소개글 때문이었을 겁니다. <블러드본>에는 '우주의 딸 이브리에타스'라는 보스가 존재하는데, '딸'이라는 표현과 '이'로 시작해 '스'로 끝나는 여섯 글자의 '신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헷갈린 듯 합니다. 게다가 '월귀'에 대한 언급까지.
그러나 실제로 '이룰루양카스'는 히타이트 신화에서 등장하는 환수라고 하는군요. 이 소설은 그렇다면 히타이트 신화를 소재로 한 작품일까. 글쎄요. 여기에 대해서는 있다가 이야기합시다.
RPG 게임에서 '소환'이라는 개념이 밀려난 지는 꽤 오래되었습니다. 이는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엔 대여점 게임 판타지 소설에서도 '정령사' 내지는 '소환사'라는 존재를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만, 이제는 '환상의 무언가를 소환하는 직업'은 주류에서 밀려난 듯 합니다.
<이룰루양카스의 딸>은 요즘은 국내 판타지계에서 쓰이지 않는 듯한 '소환사'와 '환수'를 주제로 한 소설입니다. '백악나무'와 '황도'의 적인 '월귀'가 등장하는 등, 작품의 전반적인 배경은 <다크 소울>, <블러드본>이나 <엘든 링> 같은 '프롬 소프트웨어'의 게임들을 참조한 듯한 느낌입니다.
그 점에서 앞부분만 조금 들춰보았을 때, 처음 생각한 단어는 '그림다크(Grimdark)'가 아닌가 하는 의아함이었습니다. '그림다크'는 말 그대로 어둡고 암울한 세계를 다룬 판타지 소설입니다. <워해머> 시리즈나 <왕좌의 게임>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의미 없이 죽어나가고, 폭력적인 장면이 난무하는 작품군 말입니다.
그러나 읽을 수록 그것도 딱히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얌 말도고 다른 여성 캐릭터가 여럿 나하르 주변에 등장할 때 느꼈습니다. 아, 라이트노벨이구나. 그것도 이 스타일은 한 80년대 ~ 90년대 스타일에 가깝구나. 네, <슬레이어즈>나 <로도스도 전기>. 그런데 사실 저는 그 두 작품은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도록 하죠. <드래곤 라자> 닮았다고.
세계관은 '프롬 소프트웨어'의 작품들을 닮은 '다크 판타지'고, 캐릭터의 티키타카는 <드래곤 라자>를 닮았습니다. 소환사와 환수의 이야기는 꽤 옛날 스타일입니다. 세계관은 상당히 새로운데, 작품의 성향은 많이 올드합니다.
그러나 이 올드함은 어떤 의미에서는 기획된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수많은 '신화'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강'인 나하르와 '바다'인 얌. 고대 신화에서 얌과 나하르는 '혼돈의 상징'이라고 하네요.
그 외에도 '황도 12궁'이나 오딘 등 '세상에 존재하는 신화적 존재들의 이름'을 다 끌어모아서 '키친 싱크(Kitchen Sink)'에 가까울 정도로('키친 싱크'는 기법의 이름입니다. 주방 붙박이 빼고 다 끌어모았다는 뜻이지요.) 나열한 다음 중요한 역할을 부여합니다.
이는 특히 '환수'를 다룰 때 그러합니다. 이프리트, 골렘 등 이미 우리에게는 익숙한 이름들이 등장합니다. 왜 굳이 그랬을까요?
굳이 설정 페이지를 따로 마련하신 걸 보면 정답은 의외로 간단할 지도 몰라요. 일곱 용과 일곱 속성. 환수 간에 '상성'이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작품은 '놀이'의 감각으로 쓰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점에서 아쉬운 점이 있어요. 좀 더 작정하고 '놀았으면' 좀 더 재밌지 않았을까. 주인공의 여정과 성장에 집중하는 것보다 좀 더 환수들이 날뛰는 소설이 되었으면 어땠을까, 더 재밌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없진 않습니다.
그러나 <이룰루양카스의 딸>은 지금도 충분히 재밌는 작품이라는 말도 덧붙이고 싶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는 '재밌어지려는 단계'를 밟아나가는 작품이요. 2부가 기대되는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