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강

걷고, 생각하고, 읽고, 쓰고 가끔 차나 커피를 마십니다.

브릿G – <옷장에 일기를 숨긴 할머니>

리뷰를 쓸 때 보통은 작가에게 피드백을 제공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하나는 제가 비평가가 ‘아니’라는 자각 때문입니다. 비평가는 내려다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전 그냥 글쟁이잖아요. 옆사람이라구요. 옆사람이 내려다보면 그냥 깔보는 것밖엔 되지 않습니다.

피드백이 필요해 보이는 부분이 있을 때에는, 최대한 좋았던 점이나 앞으로 더 살아났으면 좋았을 지점들을 잡으려 노력합니다. ‘다음 번엔 더 잘 하실 거에요.’ 기분 좋잖아요. 굳이 왜 ‘동료 작가’끼리 기분을 상하는 말을 해야 하나요.

그런데 가끔 ‘기분 상해도 좋으니까 피드백 대차게 해 주세요.’하는 신청 … … . 아니, 가끔이 아니라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래서 어느 지점을 이야기해줘야 할 지 잘 모르겠군요.

일단은, 이 글의 감‘평’을 요구하신 동백차님을 포함, 이 글의 내용을 안다는 전제 하에 피드백을 제공하겠습니다.

전에 친구와 이야기 할 때 문체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무협은 대다수가 중국어 서술자인 김용을 번역한 문체를 사용한다. 이 때문에 무협의 문장에는 다른 장르와 구분되는 독자적인 개성이 드러난다.’

언어는 접변합니다. 근대기의 한국 문학을 보면 알 수 있지요. 김기림은 프랑스 보들레르를 본 게 티가 나고, 백석은 예이츠의 민속적인 시를 참조한 게 티가 납니다. 정지용은 워즈워스를 일본 유학을 통해서 배웠고, 이상은 진짜 어디서 배워온 건지 (사실 프랑스 건너 일본 건너 왔겠죠.) 지 혼자 다다이즘적인 시를 쓰고 앉아있습니다.

꼭 언어와 언어 간의 장벽에서 접변이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비디오 게임을 많이 한 사람은 비디오 게임 연출스럽고, 만화를 많이 본 사람은 만화 연출스럽습니다.

네. 장르는 장르에 맞는 문체를 가집니다. 미국식 탐정 소설의 ‘하드보일드’한 향취나 헤밍웨이나 부코스키의 ‘하드보일드’ 향취는 그 기원에 상관이 없는데도 서로 얽혀서 활용되기 일쑤입니다.

판타지요? 판타지도 문체를 많이 탑니다. 어슐러 K. 르 귄 선생님 말이었나, 다른 장르와 달리 판타지는 ‘환상’에 대해 기술하기 때문에 문체는 독자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감각으로서 환상을 받아들이는 수단이 됩니다.

그래요. 문체는 중요합니다. 이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일단 ‘웹소설’보다는 ‘일반 소설’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웹소설의 경우 일반적인 문체와 다른 리터러시를 요구하기 때문에, 이런 해묵은 문체 이야기 따위 필요없습니다.

그러면 저는 왜 이 작품에서 문체가 문제라 느꼈을까요. 문체는 글맛의 문제라, 읽는 맛이 나야 하는데 이 작품의 문체는 굉장히 평탄합니다. ‘작은 따옴표’는 생각이고, “큰 따옴표”는 대화입니다. 효과음마다 개행이 되어 있습니다.

평이합니다. 읽는 데 큰 문제는 없습니다. 하지만 독자를 끌어당기는 포인트가 없습니다. 호흡 문제라고 해야 할까요? 일방적으로 감정과 상황을 설명하고 있을 뿐, 독자에게 ‘말’을 걸고 있지 않습니다. 작품은 독자로 하여금 특수한 경험을 하게 해 주어야 하는데, 그 경험에 초대받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체는 표면이기에, 내부적인 문제가 해결된다면 곧바로 해결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입니다. 문장력 따위야 필사든 퇴고든 많이 하면 기를 수 있으니까요. 중요한 건 따로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에 앞서 액션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이 작품은 액션이 중요하며, 액션을 연습할 목적으로 쓰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 물어봅시다. 액션은 상당히 동적이고 정확해야 합니다. 영화에서조차 합, 흐름, 카메라가 안 맞으면 ‘이딴거 왜 찍었냐’ 하고 극장을 나서게 만드는 게 액션입니다. 합, 흐름, 카메라를 기억하세요. 셋 중 둘은 맞아야 합니다. 하나 정도는 실수해도 잡기술로 커버가 되지만, 둘이나 안 맞으면 없느니만 못하단 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세 가지 요소를 활용해서 동적으로 찍은 장면이 액션 장면인데, 어떻게 해야 ‘소설’에서 ‘역동감’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

본 작품은 최대한 ‘효과음’과 ‘은유적인 표현’(‘타이거의 나비와도 같은 유연한 회피’ 등)이나 ‘호칭’(화이트 타이거) 등을 멋지게 기술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앞서 말했듯 합과 흐름, 카메라입니다. 이는 균형과 템포, 그리고 시점입니다.

합에 대해서는 단순한 공격의 교차 정도로 서술해도 될 것 같습니다. 공격을 어떻게, 무엇으로, 정확하게 써내려가야 독자들은 그 내용을 히해할 수 있습니다. 마치 좌백 작가가 <들개이빨>에서 ‘자오원앙월’에 대해 서술하듯이요.

흐름은 길이입니다. 소설도 영화와 마찬가지로 시간의 길이를 조작적으로 수정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어떤 공격이 ‘아팠다’는 사실을 길게 서술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시간의 흐름의 조작은 이 공격의 ‘효과’가 얼마나 강했는지 서술한다고 봐도 무방한데, 단적으로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총알을 피하는 장면 있잖습니까. 거기서 슬로우 모션으로 360도 회전 카메라를 통해 네오의 ‘전능함’을 강조하기 때문에 굉장히 그 장면은 임팩트 있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시점입니다. 카메라는 어디에 위치하나요? 영화나 만화 같은 시각 매체에서는 카메라가 정말 물리적으로 위치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간단하게’ 액션 구도를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설은 활자 매체라, 특정한 시점을 작가가 잡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3인칭 시점이라거나, 1인칭으로 가서 내적 독백을 확실하게 밀고 나간다거나요. 그 점에서 시각 매체와 활자 매체의 액션씬 전략은 애초에 달라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액션에 대한 첨언입니다만, 프롬 소프트웨어 사 게임들 (뭐 <다크 소울>이나 그런 ‘소울 라이크’ 류들)을 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작품들은 전부 첫 보스와 최종보스전을 제외하면 대체로 기믹전입니다. 패턴을 파악하고, 지형지물을 활용하고, 특정한 전략을 취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대다수 ‘무공’이란 ‘상성빨’이나 ‘맵빨’을 탑니다. 이를테면 남권으로 유명한 ‘영춘권’은 체구가 작은 사람이 좁은 곳(배 위 등)에서 싸울 것을 전제로 형성되었습니다. 이에 반해 북권은 ‘창술’을 쓰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하죠. 일본의 ‘거합술’은 ‘칼을 뽑아 휘두를 만한 거리’를 확보할 수 있기에 존재하고, 이에 반해 동남아와 같이 정글이 우거진 곳은 무기의 길이가 끽해봐야 정글도 정도라고 합니다.

<일대종사>라는 영화에는 ‘인생은 수평과 수직’이라는 명언이 있습니다. 네, 무술이라는 건 좌표평면 위의 내뻗음입니다. 이 좌표평면은 물리적인 공간이니 물리적인 환경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정한 물리적인 공간을 가정하고, 두 사람의 무술(혹은 이능력이든)을 가정한 다음 한 사람이 이기는 순서를 만들 것. 이를 합과 흐름에 맞게 배치하고 카메라 놓을 곳을 정하는 게 액션의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필살기나 호칭을 짓는 건 천천히 생각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아직도 중요한 게 남아있습니다. 단적으로, 왜 저희가 타인의 할머니 이야기를 읽어야 하는 걸까요? 그걸 읽고 우리의 삶이 어떻게 바뀔 수 있을까요? 아니면, 충분히 읽을 정도로 재미가 있는 이야기인가요?

물론 이 작품이 ‘소일장’을 위해 쓰였다는 것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할 겁니다. 액션씬 연습 좀 할 수도 있지! (사실 그 점에서 피드백을 드리기가 꽤 껄끄러운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요컨대, 이 작품에서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지 잘 모르겠단 말입니다. 이를테면 ‘우리 할머니 멋지다.’(그러나 이 주제를 쓰려면 ‘왜 멋진 사람인가’라는 고찰이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같은 간단한 거라도 좋습니다.

사실 애초에 중요한 건 이 지점입니다. 일러스트 용어에는 ‘액팅’이라는 게 있습니다. 일러스트 안에서 그 캐릭터가 해당 표정이나 포즈를 취해야 할 당위를 일컫는 말인데, 결국 이 작품에서 ‘포인트’를 주고 싶은 건 무엇이었나요?

이 포인트에 따라서 작품의 방향성이 결정되고, 액션씬의 추구미가 결정되며 결국 문체마저 결정짓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 이 정도로 빡세게 쓰질 않아서, 여러모로 부족한 면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남기는 것을 좋아하는 분이라는 걸 알아서, 굳이 이런 식으로 장문 피드백을 써 봅니다.

#브릿G #소설 #리뷰 #감상문

대뜸 하는 말이지만, 픽션이 허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다.

물론 <007> 이라던가 <제이슨 본>은 진짜 벌어진 일이 아니다. 뉴욕 한복판에서 <존 윅>은 총을 쏘지 않았으며, 하물며 <반지의 제왕>이나 <던전 앤 드래곤> 같은 가상 세계가 실존하지는 않는다. 먼 미래에 <스타 워즈>나 <스타 트렉>과 같은 일이 일어날지는 현재의 우리로서는 모르는 일이다.

그럼에도 픽션을 보는 이유는 독자에게 제공하는 것은 한 톨의 믿음 때문이다. 어딘가 꿈과 희망이 넘치는 환상이 있을 거라는 믿음. 모험의 흥미진진함이나 무찔러야 할 사악한 악, 그리고 정의의 승리 같은 거라도.

하지만 어느 순간, 픽션이 해체되는 것을 보았을 때 깨달았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모험이나 악, 정의 같은 게 없었다. 그저 톱니바퀴가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톱니바퀴 소리에, 아무런 의미도 부여할 수 없었다.

소개가 늦었다. <아바나의 우리 사람>은 그레이엄 그린의 장편 소설이다. 스파이 소설이지만 코미디 장르로 시놉시스부터가 상당히 유쾌하다.

쿠바의 아바나를 배경으로, 진공청소기 판매상인 워몰드가 영국 비밀 정보부 요원이 될 것을 제안받으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하나뿐인 딸의 뒷바라지를 위해, 워몰드는 돈을 받으며 스파이 활동을 가짜로 꾸며낸다. 거짓말에 불과했던 스파이 활동이 워몰드의 현실을 잠식하기 시작하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영국은 스파이 소설의 본고장이다. 이언 플레밍, 존 르 카레 등 수많은 스파이 소설 작가들이 영국 출신인데, 이들 대다수가 MI6 요원 출신이라는 사실마저 유명하다. 가까운 미국만 해도 탐정, 경찰이나 군인 출신이 은퇴 후 범죄 소설 작가가 되는 일이 흔한데, 영국도 비슷한가보다. 그레이엄 그린은 스파이 출신은 아니지만, 정치적 색채가 진한 작가로서 어느 정도 맞닿아는 있는 것 같다.

이 두 가지 사실만 보면 굉장히 ‘엄격한’ 스파이 소설일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대화는 코믹하며, 악당들은 어리숙하다. 주인공은 한숨만 푹푹 내쉰다. 그레이엄 그린은 이미 <아바나의 우리 사람>을 쓰기 전에 ‘진지한’ 다른 작품을 숱하게 쓴 작가였고, 이 작품은 집필 의도 자체가 근엄하게 작품을 써내려가는 게 아니었다.

가끔 이런 장르를 쓰는 작가들이 ‘웃긴 작품’도 쓰지 않던가. 나는 히치콕의 <해리의 소동>이라는 작품의 존재를 좋아한다. <싸이코>나 <새>,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같은 작품이나 찍던 사람이 찍은 코미디 영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굳이 이 작품을 읽으려고 발버둥을 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추리, 미스터리, 혹은 스릴러. 이 세 장르는 매대에서 한 데 묶인다. 그리고 이 매대는 손대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다. 한국에서 <아바나의 우리 사람>은 ‘열린책들 세계문학’으로 분류되지만, 그것은 ‘영국 스파이 스릴러’라는 장르적 특수성에 기인한다. 마치 동구권 SF가 출판사 ‘현대문학’에서 출간되듯이 말이다.

<아바나의 우리 사람>은 영문판으로 이미 읽은 적이 있다. 그럼에도 또 읽은 이유는 일단 영문판이라 제대로 읽지 못했고, 겨우 읽은 내용도 다 까먹었기 때문이다. 나는 시놉시스를 읽고 이 작품의 내용을 처음 알았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다 읽었다. 사흘이 걸리지 않은 것 같다. 대다수의 평범한 작품은 말을 하지지 않는다. 이는 작품의 문제일 수도, 독자인 나의 문제일 수도 있다. 말을 거는 몇몇 작품은 내게 상처를 낸다. 이들은 대체로 그래도 ‘좋은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실제로 내가 마음에 들어하는 작품은 내게 흉터를 내는 작품들이다.

<아바나의 우리 사람>은 둘 다 아니었다. 다 읽고 허탈하기가 그지없었다. 그리고 주마등처럼 나를 이룬 여러 작품들의 모습이 스쳐지나가는 것이다. 소설, 음악, 영화에서부터 비디오 게임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작품들이 나에게 하던 말을 스쳐 보내다가, 꿈에서 깨어나 자리에 앉은 기분이었다. 깨어났을 때 든 기분은 비참함 같은 게 아니었다.

그냥 허탈함이었지.

삶에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은 보통 실존주의 철학을 본다. 특히 고등학생 때나, 대학생 때 자주 보게 되는 건 카뮈나 사르트르, 혹은 니체 등이다.

주변에 철학도가 꽤 있었기 때문에, ‘실존주의’라는 걸 들입다 팠다. 한번 떠먹어 보려는 시도조차 아니었고, 그냥 들입다 팠다. 실존주의의 계보는 키에르케고르부터 시작해서 쇼펜하우어와 니체에서 기독교와 선을 긋는다. 카뮈, 사르트르, 그리고 하이데거 등에서 ‘실존주의’로 명명될만한 작업물들이 나온다. <시지프 신화> <존재와 무> 그리고 <존재와 시간> 같은.

그러나 이들은 철학적으로 순수할 수 없었고, 하이데거의 제자인 한나 아렌트 등에 이르면 정치철학으로 귀결된다. 결국 ‘철학의 의미’라는 것도, ‘정치성’과 동떨어질 수 없는 거라고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마치 오펜하이머의 연구가 정치와 분리될 수 없듯이 말이다.

픽션 또한 마찬가지다. 픽션은 기계장치에 불과하다. 거기에서 의미를 찾으려 해봤자 우리는 거기서 우리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춰 볼 뿐이다. 그러나 그 거울상에서 우리는 하나의 흐름을 마주하게 되고 … … .

이 흐름은 우리를 어딘가 다른 곳으로 안내한다. 그것이 어디가 될지는 작가와 독자만이, 아니, 아무도 모른다. 기형도가 <대학 시절>에서 말하듯, ‘나뭇잎마저 무기로 사용’되는 시대에서 픽션은 자유로울 수 없다.

왜 갑자기 <아바나의 우리 사람> 이야기하다가 뜬금없이 실존주의 이야기하더니 또 갑자기 픽션의 정치성 이야기하는지 모를 것이다. 이는 개인적인 고민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바나의 우리 사람>은 굉장히 정치적인 글이기 때문이다.

그 시절 스파이 소설이란 굳이 이 장르의 거장인 존 르 카레 이야기를 꺼내지 않더라도 (오히려 존 르 카레보다 이전부터 활동해온 그레이엄 그린의 후기작이기에) 정치에 대해 다루기 마련이고, 때문에 다루는 내용은 상당히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아바나의 우리 사람>은 가볍게 쓰였다고는 하지만, 영국 정보부를 풍자하려던 목적이 분명히 있었다.

핵심은, 주인공인 워몰드가 정보부를 농락하는 방법이 ‘가짜 보고서’로 ‘가짜 요원’이나 ‘가짜 정보’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허구의 존재들은 정보부를 교란하고, 정보부로 하여금 특정한 사고를 하게 만든다. 세계 정세를 주름잡는 허구(Fiction)가 워몰드의 손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워몰드를 둘러싼 정보부 사람들은 ‘허구’를 믿는 사람들이다. 허구로 쓰인 내용을 믿는 사람들에 의해 워몰드와 그 주변부의 ‘진짜 세계’는 위기에 처한다. ‘작가’가 쓰는 ‘허구’에 ‘의미’가 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들. 사실 전부 거짓말인데 말이다.

픽션을 좋아하는 사람이긴 했다. 픽션이 허구라는 사실을 마음 한켠에서는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을 깨달은 지금은 앵간한 대다수 작품에 별 흥미가 없다. 그것이 심지어 그게 내가 쓰는 작품이어도 그렇다.

테라리움을 만들어 그 안에 꽃이라도 집어넣듯, 픽션을 만들어 거기에 나 자신을 투영한 뭔가를 집어넣은 다음 두고두고 쳐다보고 싶었다. 앞서 말했듯, 픽션의 설계도와 그 작동 원리, 효과까지 알게 된 다음부터는 팍 식어버렸지만 말이다.

워몰드가 픽션을 쓰기 시작한 건 딸인 몰리를 위해서다. 그는 영국 정보부에 충성하기 위해, 혹은 자기가 만들어 낸 가상의 세계를 사랑한 게 아니었다. 그에게 실존하는 세계는 정보부와 그 파워 게임이 아니며, 자기 자신과 딸 몰리 뿐이다.

워몰드와 딸과 새로운 아내와 함께 다른 세계로 떠나는 것을 보고, 나도 내가 발을 걸친 어느 세계를 벗어났음을 느꼈다. 그게 정치적인 기계 장치 놀음인지, 아니면 내가 만들어 낸 가상의 세계인지는 잘 모르겠다. 무언가에 대해 마음을 접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편하게 된 게 아닐까.

나는 책을 덮었다. 세계는 그 안에 없었다.

#소설 #리뷰 #감상문

브릿G – <초자연현상처리반>

격리 픽션은 퍽 매력적인 장르입니다. 마침 저는 최근 격리 픽션 장르의 대표적인 비디오 게임인 <컨트롤>을 클리어한 참입니다. PS4 시절에 한 번 깨고, 스팀판으로 다시 플레이했습니다.

이 게임을 하고 바로 다음에 <초자연현상처리반>을 읽으니 감회가 새롭네요. 모종의 사건에서 살아남은 황예담과 사라진 한태준, 그리고 초자연현상을 일으키는 ‘쐐기’를 토대로 흥미진진하고 힘있게 진행되는 장편 소설입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일단 장르에 관하여 말해볼까요. 앞서 ‘격리 픽션’이라고 말했었죠. <초자연현상처리반>은 ‘격리 픽션’ – ‘음모론 SF’ 등에 속하는 호러에 다소 한국적인 판타지를 섞은 작품입니다.

격리 픽션은 흔히들 의 등장과 함께 인기몰이를 한 장르라 생각하지만, 사실 그 족보는 꽤 오래되었습니다. , <프린지>와 <웨어하우스 13>과 같은 미국 드라마, <케빈 인 더 우즈> 같은 메타-장르적 호러 영화나 <블레어 위치 프로젝트> 같은 ‘파운드 푸티지 기법’ 등, 폭 넓은 ‘호러 레퍼런스’에 기대어 등장한 는 … … .

사실 4Chan에서 등장했습니다. ‘SCP-173 조각상’은 거의 원본이나 다름없는 <닥터 후>의 ‘우는 천사’ 에피소드가 방영된 지 일주일 후에 게시판에 업로드되었습니다. 그때는 SCP라는 게 구체적으로 존재하기 이전이었고, 프로 내지는 작가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만들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보고서’의 형태로 ‘번호’와 ‘등급’ 그리고 ‘양식’이 있다는 게 뭇 게시판 유저들의 흥미를 끌었고, 여기저기서 그 형식을 따라하다가 결국 ‘정리’를 한 것이 의 기원입니다. 즉, ‘격리 픽션’은 생각보다 족보가 뚜렷한 게 아닙니다. 그저 그것을 즐겁게 향유하는 사람이 많아지니 우리의 머리가 착각을 일으켜 멋대로 계보화한 것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보통 계보니 족보니 하는 건 꼬이기 마련입니다.

특히나 미국인은 상상력이 모자라기라도 한 건지, 기묘한 게 있으면 두들겨패려고 안달이 나 있습니다. 그 결과 SCP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확보, 격리된 다음 보호를 하는 게 아니라 총칼로 두들겨패야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요컨대 대다수 격리 픽션 장르의 작품들은 톰 클랜시스러운 테크노스릴러나 밀리터리와 결합하고 만 것입니다.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되니까, 어떻게든 확보해서 통제해야지요.

<초자연현상처리반> 또한 이런 장르적인 도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게다가 문장과 전개에 굉장히 힘이 있고, 역동감이 있기 때문에 순식간에 읽을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네요.

모 친구는 작품에 동의하지 못하는 지점이 있더라도, 앵간하면 리뷰로 남기지 말라고 합니다. 일단 리뷰를 읽는 사람의 기분도 사람이고, 글을 쓰면 기록으로 남기 때문입니다. 소위 ‘꼽주는 게 기록으로 남으면 흉진다’는 건데, 그래도 너무 아쉬웠어서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말하려는 아쉬웠던 점은 작가가 다른 작가에게 절대로 지적하면 안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면 ‘그럼 너는 잘 쓰냐?’ 하는 소리를 듣기 때문입니다. 바로 문장 내지는 문체의 템포입니다.

오탈자나 비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성입니다. 문장은 평이하여 읽기 좋고, 술술 읽어내려갈 수 있지만, 포인트가 없이 전방위를 비추는 카메라 같은 느낌입니다.

한때 저도 소설에 문체 그딴 게 왜 중요한지 이해를 못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문체를 따지게 되더군요. 문체는 영어로 Style입니다. 무협을 쓰려면 멋들어지고 힘있는 한자성어 정도는 쓸 수 있어야 하고, 하드보일드를 쓰려면 담담하고 건조한 문장이나, 혹은 정 반대의 우수에 찬 아저씨 문장을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판타지나 공포 장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현실을 배경으로 한 문학보다 더욱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어슐러 K. 르 귄 선생님조차 에세이에서 ‘환상을 묘사함에 있어 문체야말로 모든 것’이라고 언급하신 적이 있습니다. 왜냐면, 독자들은 존재하는 물체에 대해서는 익숙하지만 환상에 대해서는 작가의 묘사가 유일한 이해의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러브크래프트도 특이한 서술전략을 활용했습니다. 처음에 ‘형언할 수 없다’를 써놓은 다음, 실제로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상세히 묘사하고, ‘역겹다’ ‘불경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SCP의 보고서 양식도 대표적인 서술 전략입니다. 문학 수업 시간에는 ‘낯설게 하기’라는 말을 많이 하지요. SCP의 보고서 양식은 익숙한 물체를 낯선 대상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 결과 우리는 ‘현실’과 ‘환상’ 사이 ‘상상’이라는 간극을 헤엄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대해 ‘그럼 너는 잘 쓰냐?’고 물으면요. 도망치겠습니다. 하지만 <초자연현상처리반>은 이런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답니다. 재밌는 소설, 감사합니다.

#브릿G #소설 #리뷰 #감상문

브릿G – <부산성>

한국에서 서울을 제한다면 부산만큼이나 부산스러운 곳은 없을 것입니다. 저야 부산을 나선 적이 거의 없으니 다른 곳이야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부산 사람은 부산에 산다는 것에 기묘한 자긍심을 가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이를테면, ‘서울 떡볶이 떡은 떡볶이 떡을 쓰고 가래떡을 안 써서 가늘고 맛이 없더라’라고 떠들거나, ‘부산 사람들은 야구를 좋아하며 롯데를 응원한다’ 혹은 작품에 언급된 대로 ‘부산 사람은 술이 세다’라던가요.

앞서 언급했듯 저는 부산 사람입니다. 때문에 부산에 대해 사유하려고 노력한 적이 있습니다. 그저 제가 사는 곳이고, 앵간해서는 떠나지 않을 곳이며, 그러면 자발적으로든 마지못해서든 사랑해야한다는 의무감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어항 안의 물고기야말로 어항 속 물에 대해 알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야 바다를 알지 못하는 물고기니까요. 수질의 품평이란 여러 물 속을 헤엄쳐 본 여행자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요컨대, ‘부산성(釜山性)’을 정의할 수 있는 것은 ‘비(非)-부산성’을 정의할 수 있는 사람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단계 더 나아가봅시다. ‘부산’이라는 이미지는 ‘부산’의 역사와 ‘부산 사람’의 자의와 타의, 그리고 ‘부산을 다룬 미디어’에 의해 재생산된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겁니다. 그 결과, 개인이 규정한 ‘부산성’이라는 것은 자꾸만 실제 ‘부산성’을 이탈합니다.

세상은 열려있으나 개인의 사고방식은 닫혀 있습니다. 우리가 걷는 세상 중 개인의 사유할 수 있는 건 단편의 궤적에 불과하며, 언어는 대화를 위해 잠깐 핀으로 박아 둔 포스트잇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언어는 실재를 쫓아가는 궤적에 불과한 것일까요. 모든 것이 골방 속 사유에 불과한 것일까요.

조금 더 긍정적인 대답을 해도 될 듯 합니다. ‘부산성’이라는 것은 모든 ‘부산성’의 집합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한 코르크 보드에 포스트잇이 모이고 모여 단서를 형성하듯, A의 ‘부산성’ B의 ‘부산성’ 그리고 무수히 많은 사람의 ‘부산성’이 한 자리에 모입니다. 그 모든 제각각과 집합을 ‘부산성’으로 규정하는 것도 퍽 아름답지 않을까요. 그만큼 세상이 넓다는 반증이니까요.

첨언하자면, 여기는 피난민의 땅이기도 합니다. 단일한 하나의 ‘부산성’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기도 합니다. 부산에 잘 오셨습니다.

#브릿G #소설 #리뷰 #감상문

이웃사촌 아이스크림 트럭 희망세탁소

환상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민담에 대해서도 종종 이야기한다. 톨킨 이후의 정형화된 ‘가상 세계 판타지(혹은 우리 나라에서는 정통 판타지가 부르는 그것)’가 아니라, 좀 더 원초적인 것들을 이야기할 때, 이를테면 예이츠의 <켈트의 여명>이나 워싱턴 어빙의 <슬리피 할로우의 전설> 같은 것.

전자는 이야기 채록집이고, 후자는 엄연한 단편 소설이지만 둘을 비슷한 선상에 놓아도 될 것이다. 워싱턴 어빙이 단편은 유럽의 설화를 미국 이주민들의 세계에 불어넣기는 구조로 되어 있었으니까.

이러한 이야기들은 민족적인 신비와 경이감을 자아낸다. 믿기 힘든 이야기, 그러나 할머니 대대로 내려왔고 왠지 있을 법도 한. 그래서 무섭고 기이한. 이런 경이감과 경이감의 경계에서 환상은 태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시골에 살고 있지 않고, 민족이라는 말은 고리타분하게 느껴진다. 환상은 사라졌는가? 천만에. 어떤 낭만이 지워진 채 민낯을 드러냈을 뿐, 환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카프카의 <변신>이 그러한 작품이었다. 하루 아침에 벌레가 되어버린 노동자. <변신>은 엄연히 단편 소설이지만, ‘작가’가 뒤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더라면 또 모르는 일이다. 현대 사회의 기담으로 남았을지도.

요컨대 환상은 현대 사회에도 형태를 바꿔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디서 환상이 태어나는가.

과거에 역사적으로 채록된 자료집은 그저 박제된 채 남아있을 뿐이다. 박제된 자료를 그대로 소설에 쓸 수도 있겠으나, 꽤나 전투적이고 실전적인 작가라면 그 박제된 자료를 그대로 활용하지는 않으리라.

더 바깥으로 나아간 작가들은 직접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 또한 무에서 뭔가를 빚어내는 건 아니다. 그들이 포착하는 재료들은 조금 더 실전적인 감각과 이미지들이다. 밤에 산을 타고 흐르는 희무레한 것들은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 ‘슬렌더맨’이 되고, ‘팔척귀신’이 되고, ‘장산범’이 된다.

그 점에서 작가가 쓴 세 편의 단편들은 조금 더 바깥으로 나아간 경우다. <이웃사촌>은 층간 소음에서, <아이스크림 트럭>은 심야 아이스크림 트럭에서, <희망세탁소>는 세탁소에서 끄집어낸 환상이다.

작가는 이 세 편의 단편에서 강렬한 이미지(<이웃사촌>의 경우에서는 청각이겠다)를 활용한다. 도저히 문을 열 시간이 아닌데 장사를 하는 아이스크림 트럭, 기이한 현수막을 내건 세탁소. 강렬한 이미지와 마술적인 묘사로 독자의 시선을 잡아끈다. 그리고 이미지의 뒷면, 아무도 누구도 표정을 짓지 않는 스크린의 뒷면에 내동댕이친다.

눈길을 끄는 이미지와, 그 뒷면 사이의 경계 지대. 작가는 그 곳에서부터 환상을 쌓아올린다. 그리고 독자를 홀려 그 환상에 내동댕이친다. 그 기묘한 리미널(Liminal)함이 느껴지는 단편들을 읽어보는 건 어떤가.

#브릿G #소설 #리뷰 #감상문

잊었던 건지, 억지로 누름돌을 얹었던 것인지, 사람이 감정에 무디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감정에 일일이 휩쓸려서야 사람이 살아나갈 수 없기 때문이겠죠. 그러나 감정은 해소하기 전까지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쏟아내지 않았던 감정들은 사소한 계기로 다시 치솟아 오릅니다. 언제적의 감정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계기조차도, 오랜만에 읽은 무슨 잡지 때문일 수도 있고, 누군가가 건넨 레몬 카라멜 때문일 수도 있을 겁니다.

용복 작가님의 <레몬 카라멜 타임 슬립>은 그런 감정의 아련한 쇄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마술적 리얼리즘(Magical Realism)적인 미묘한 타임 슬립 요소가 있고, 호러 요소가 있습니다.

꽤 놀랐던 점은 이 작품이 부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작품 내에서 ‘부전시장’이라는 시공간은 지금도 실재합니다. 부산의 번화가인 ‘서면’ 근방입니다. 자주 가는 곳 근처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가본 적은 없는 것 같네요. 버스를 타고 지난 게 다일까요.

300번지도 실재했던 공간입니다. 작품을 읽어보고 나서야 ‘부전시장을 직접 인용하신 걸 보면 당연히 존재하거나, 그랬던 공간이겠지’하고 어림짐작했습니다만, 저는 이 공간의 존재가 의외였습니다. 첫째로 부전동 자체가 시내기도 하고, 부산의 문화를 다룬 어떤 서적에서도 300번지를 다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도 나오는 기록은 적고, 사진 기록은 더욱 적습니다.

부끄러운 역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그런데 부산역 차이나타운 거리 바로 옆에는 ‘텍사스거리’가 조성되어 있는걸요. 이 거리도 홍등가로 유명했던 곳입니다. 그에 비해 300번지는 사진 몇 장 남기고 잊힌 것 같아요. 어떤 것은 기록조차 남지 않아 쉽게 잊혀버리고, 어떤 것은 상품이 되어버립니다.

잊힌 것들이 몸부림치는 방법은, 역시 개인의 기억을 더듬는 것 뿐입니다. 개인의 기억을 더듬을 수 있는 수단은, 오로지 감각 뿐이구요. 오감. 시각과 청각 그리고 촉각, 그리고 맛과 향. <레몬 카라멜 타임 슬립>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어떤 역사에 대해 오감으로 몸부림치며 ‘이걸 나만 알았던 거야?’하고 소리지르는 짧은 엽편입니다.

조금 더 자료 조사가 많이 되어서, 분량이 길어 어떤 ‘자기주장’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지면을 얻었더라면, 작품은 방향성이 많이 달랐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이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졌을지, 아니면 작가적 에고에 매몰된 채 무용한 주장을 내었을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지금의 <레몬 카라멜 타임 슬립>은 이미 엽편으로서 충분한 것 같아요.

#소설 #브릿G #감상문 #리뷰

'읽기'는 여기서는 많은 걸 포괄하는 단어입니다. 굳이 서적뿐만 아니라 영화, 게임과 같은 종합 미디어나 심지어는 음악마저도 포괄하기도 합니다. 요즘은 미디어가 마구 쏟아지는 시대죠.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미디어를 읽어내기를 강요받습니다. 이번 주 넷플릭스 신작, 어떤 아티스트 신보, 너무 많이 보다 보면 결국 '뭘 볼까' 결정하는 단계에서 '로튼 토마토'나 '메타크리틱'같은 '비평가' 내지는 '큐레이터'에게 사고를 외주 주기도 하고, 뭐 그렇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고 쌩으로 부딪혀보는 사람도 존재하지요. 많이 읽다가도 불현듯 읽기를 멈추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유야 다양합니다. '읽을 여유가 없어서'가 대표적일 겁니다. '재미가 없어져서'도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취향이 있습니다만, 가끔은 취향이 사람을 잡아먹는 일도 존재합니다. “너는 SF를 좋아하니까, 이번에 나온 넷플릭스 신작 영화를 꼭 봐야 해. 그게 너를 구성하니까.”

어느 순간부터 '취향'은 일이 되어 사람을 갉아먹어요. 누구나 미디어를 감상할 때 취향 하나 쯤은 있습니다. “이 사람은 '호러'를 좋아하고, 저 사람은 '무협'을 좋아하니까 나도 하나쯤은 뭐가 있어야 한다.” 잘 갈고 닦아진 취향은 그게 없는 사람들이 보기에 멋있습니다. 질투가 날 정도죠. 그 결과 우리의 '라이오스 짤'은 무한정 확대 재생산되기에 이릅니다. “진짜 '드래곤 마니아'들을 보면 ⋯ 내 어중간함에 신물이 나 ⋯ !” 미친듯이 많이 읽는 게 장땡이라고 생각하던 순간이 저도 물론 있었습니다. 10대 ~ 20대 초 쯤은 '취향을 형성하는' 기간이라고 누가 말하더라구요. 한국 판타지 씬에서는 이영도에서부터 시작해서, 그 시절 신전기 라이트 노벨,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이 번역된다고 해서 3권까지도 읽어보고, 국내에는 없는 작품까지 읽어보려고 <디스크월드>의 야경꾼들을 다룬 파트나 아이튠즈 미국 계정까지 만들어 영상물을 구매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많이 보려고 한 이유라면 그야, 저는 그때는 '작가'를 할 거라고 굳게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한쪽에서는 무엇으로 먹고 살건 간에 다른 한 쪽에서는 '문필가'로 살 겁니다. 그건 그만두고 싶다고 그만둘 수 있는 건 아닐 거구요.

많이 본 걸 후회하는 건 아닙니다. 그땐 '컨텐츠'가 쏟아지는 속도가 지금같지 않았습니다. 물론 저야 과욕을 하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는 감당해 낼 체력이 되었습니다. 구매한 컨텐츠가 100이라 치면 거기서 할인이 반은 들어갔고 그 중 반은 읽었으니 남는 장사라 이겁니다. 근데 어느 순간부터 그게 '안 먹어지는' 순간이 옵니다. 사놓은 건 유통기한이 다 되어서 차마 못 보겠고, 새걸 사자니 구매할 여유도 사고 나서 읽을 여유도 안되는, 그런 순간이 옵니다. 보통 그때쯤 먼저 깨닫는 건 '내 취향의 작품을 모두 다 먹어볼 필요는 없다'는 걸 겁니다. <카우보이 비밥>이 전설적인 작품이라고 해서 모두가 그걸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야 <카우보이 비밥>은 그 세대 사람들이 그 세대에 맞는 방식 – 주 1회 24회 분량 – 으로 보았기 때문에 전설적인 것이지, 지금 세대 사람들이 굳이 <카우보이 비밥> 24화를 하루종일 몰아본다고 그때만큼 재미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요즘 느끼는 건, '취향을 다듬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남의 취향이 부럽다고 새로운 취향을 추가하거나, 무리하게 확장하는' 게 아니라 말이죠. 한동안 '남의 취향'을 질투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야 잘 다듬어진 취향은 그 사람의 '세계'니까요. 다른 사람들의 세계가 넓고 잘 다듬어진 걸 보면서, 왜 나는 저만큼 못 따라가나, 저런 세계 속에서 살아갈 수 없나 하면서 소외감을 느끼는 때가 있습니다. 사실은 지금도 조금은 그래요. 그때 필요한 건, 잠깐 뒤돌아보는 겁니다. 여태껏 뭘 읽어왔나, 어떤 세계를 봐왔나 하구요. 그러다 보면 불현듯 깨닫는 순간이 옵니다. 나는 먼 길을 왔고, 그 사람들과 방향이 달랐을 뿐이구나.

그래서 요즘은 예전에 읽었던 작품을 다시금 읽어보고 있습니다. <듀라라라!!>나 <마법사의 신부>라던가, 아니면 <존 윅> 시리즈 같은 것도 좋았구요. 마음같아서는 예전에 읽었던 <디스크월드> 원서를 읽어보고 싶은데, 영어 실력이 떨어졌을 게 뻔해서 읽는 게 무섭습니다. 더 어릴 때 취향으로 건너가서 <셜록 홈스의 모험>도 좋구요. 이렇게 되짚어가다보면, 슬슬 누군가 말 거는 목소리가 들려 옵니다. 그건 아마 아직 태어나지 않은 소설 속 인물들의 목소리일 겁니다.

#문학 #에세이

브릿G 끼앵끼앵풀 – <대화>

가끔 작가들은 작품이 작가와 독자의 대화라는 측면을 망각하고는 합니다. 굳이 직접적인 메시지의 주고받음이 아니더라도요. 덧글창에서 덧글로 한마디 남기기도 하고, 리뷰로 장문 감상을 남기기도 합니다. 작가 – 작가 간의 관계라면, 작품으로써 대화하기도 하겠죠.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게 이전에는 일방통행적이었을겁니다. 1900년대만 하더라도 러브크래프트와 위어드 테일스 작가진들 간에 '서신'으로 대화가 이루어졌고, 그 이전에 에밀리 디킨슨과 같은 시인은 방 안에서만 시를 쓰다가 죽고 나서야 남편이 그 많은 시들을 추려내 공개가 된 시인입니다.

이 작품에서 언급하는 <대화>와는 다른 이야기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상한 말을 하는 건, 최근에 고민하던 주제기도 하고 – 그냥 방에 틀어박혀 있다가 갑자기 나오고 싶어졌기 때문입니다. 리뷰어로 써야 할 리뷰가 밀리긴 했는데, 사실 그냥 4주 남은 거 쓰지 말고 보상도 포기할까 하고 있었는데, 별안간 작가님이 작성한 큐레이션에 선정되어서요.

소설이건 리뷰건 뭘 쓰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뭘 쓰라고 요구받지도 않는 상황에서 퍼진 채로, 사랑니 뺀 후유증으로 널브러져 있다가 별안간 리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대화>라는 작품 자체를 줄거리로 요약한다면, 별 내용 없을 겁니다. 안드로이드와 소년의 여행과 교감, 그리고 갑작스런 환경의 변화로 끝나버리는 작품입니다. '서사'라고 불러야 하는지도 의문입니다. (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작가님이 더 잘 아시겠지요.) 장편 소설의 서사보다는 뮤직비디오의 서사 같은 느낌이랄까요.

그러나 불러일으키는 감정만큼은 확실합니다. 소통불가능한 두 존재의 소통 시도. 저는 <윌-E>를 본 적 없지만, 마치 무성 영화를 보는 느낌도 드는 게 저 영화 생각도 나네요. 서사적인 역동감보다는 정적인 서정성을 강하게 드러낸 작품이라는 점에서 레이 브래드버리 느낌도 나는 작품이었습니다. 가끔 시처럼 소설을 쓰시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요즘은 폄하되는 기법이 있습니다. '말하지 않고 드러내기'는 한때 소설의 기본 기법이었습니다. 헤밍웨이는 이를 '빙산 기법'으로 불렀다죠. 첫 문장을 쓰고, 부연적인 묘사를 한 다음에, 첫 문장을 지워버립니다. 어떤 면에서는 영국식 농담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런 걸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소설에서는요. 영상에서는 그래도 살아있습니다. 예를 들어 <존 윅> 보는데 존 윅이 일일이 기술명을 외치면서 액션을 취한다면 폼이 다 떨어질 겁니다.

물론 만화적 측면을 살리기 위해서 거꾸로 이 방향을 취할 수는 있는데 그건 아무래도 방향성 자체가 다른 거니까요.

아니다, 사실 영상에서도 그다지 살아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매체는 갈수록 숏폼을 내세우고, 아마 <존 윅>을 극장이 아니라 스마트폰 크기의 모바일 화면으로 본다면 <무한도전> 자막 정도는 띄워줘야 볼 수 있을 겁니다.

웹 연재 소설은 그 여파가 제일 심하죠. 사실상 소설이라는 매체가 절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나서 부활한 셈인데, 웹소설이 출판소설의 문법과 같을 리가 없습니다. 그냥, 당장 말하는 게 좋습니다. 묘사는 커녕 설명조차 귀찮습니다.

사실 그 점에서 무협은 서술전략이 효율적이죠. 한자어니까.

그럼 그렇게 해야 돈이 벌리고 독자를 얻을 수 있으니까 모든 작가가 그렇게 써야 하느냐구요.

사실 그 점에서 제가 한동안 방에 틀어박혔던 것 같습니다. 제가 쓴 <청춘 환상 검무곡>이 첫 작품 치고 썩 나쁘지 않았다고는 주변에 말하고 다닙니다만, 그래도 모자람은 많은 작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뭔가 콩고물이라도 떨어지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더라구요. 정작 취직은 커녕 아르바이트도 아직 못 구했는데, 관성은 이미 당겨진 채라 갑자기 멈춰서니 굴러떨어지는 게 많이 아팠습니다.

제일 괴로웠던 건 옆사람에 대한 질투였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근처 사람들은 이미 작가로서든 학자로서든 데뷔해서 잘 나가고 있는데, 하다 못해 일자리라도 있는데 저만 멈춰 서 있다고, 그러니까 멈추지 말고 계속 글이라도 써야 한다는 괴로움이요.

그 사람들이 '어떻게 써야 한다'고 하는 말들을 듣는 게 제일 기가 꺾이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네. '말하지 않고 드러내기'는 바쁜 세태에 맞지 않는, 비효율적이고 고리타분한 방식일지 모릅니다. 그래서요?

요즘은 수많은 컨텐츠를 쳐내는 시대입니다. 쳐낸다는 말에는 세 가지 의미가 복합되어 있습니다.

쳐 많이 쏟아내다 쳐 많이 읽어내다 쳐 많이 튕겨내다

사실 이거 아니었는데 전에 써놓은 게 있었는데 지워졌어요. 아무튼 간에 이런 세태에 글이나 쓴다는 건 그 쏟아지는 컨텐츠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일입니다. 컨텐츠를 보고나면 그래서요. TV에 나오는 모 유튜버 누군지 모른다고 가족한테 말했더니 '넌 평범한 사람들과 스몰 토크 거리가 없니?'하고 갈구더라구요.

컨텐츠 보는 것조차 노동이 되어버린 시대에 '돈도 안 되는' 창작을 한다는 건 한가로운 일입니다. 그래서요. 그 한가한 순간을 위해서 일하는 게 아니었던가요. 그 한가한 순간을 남들과 공유하기 위해, '대화'하기 위해 창작을 하는 게 아니었던가요.

적다 보니 <대화> 자체랑은 상관 없는 글이 되어버렸네요. 쉬다가 갑자기 글을 쓰면 또 이렇게 됩니다. 큐레이션에 <대화> 말고도 다른 작품도 읽었는데, 유쾌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저도 부담 없이 다시 글 쓸 수 있을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브릿G #문학 #소설 #리뷰 #감상문

의외로 힙합을 자주 듣습니다. 물론 제가 좋아하는 건 재즈 힙합이나 클라우드 랩 계열입니다. 트랩이나 그라임이나 그런 건 좋고 나쁨을 평가하기 이전에 제 귀가 견디지 못하는 편입니다. 풍경에 어울리는 음악을 듣는다고 했지요. 소도시 풍경은 네온사인도 없을 정도로 한적하기 때문에, 강렬한 트랩 씩이나 듣고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좀처럼 '리스너 그룹'과 어울리질 못해서, 그 안에서 힙합 음반을 두고 어떤 평가가 이루어지는지 잘 알진 못합니다. 그래도 어림짐작은 가능합니다. 주로 해외 래퍼들 음반을 좋아하겠지요. 제가 그랬으니까요. 해외 래퍼들 가사까지 번역을 해가며 다 듣다가, 할 거 없는 사람들이 끝에 가서 한국 힙합을 들'었'을 겁니다. 더 옛날 '한국 힙합'이 없던 시절엔, '왜 없어? 그럼 내가 만들어야지.' 하는 사람들이 있었겠죠.

소설에서나 음악에서나 장르가 이식되는 과정은 늘 비슷했습니다. 무협이나 판타지 소설이 그렇습니다. 하이텔 등지에서 중국 무협 소설을 다 읽고 할 거 없는 사람들이 무협을 쓰기 시작한 것이라 들었고, 이영도 같은 경우에도 <반지의 제왕>이나 <로도스도 전기>니 하는 걸 구해 보다가 도저히 못 참겠다 싶어서 <드래곤 라자>를 쓰기 시작했을 겁니다. 그러니 '한국 장르'란 마이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식된 것인데다, 좋아서 하는 건데, '정말 먹을 게 없어서' 하는 것에 가깝거든요. 하는 사람들도 한줌단이라 이걸로 먹고 사는 것? 포기한 다음에야 가능합니다.

그 점에서 '한국 힙합'은 까내려지기 바쁩니다. 우선적으로 '토양이 맞지 않다'는 게 주된 비판점입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영혼을 한국인이 담아낼 수 있느냐'는 것이나, '그냥 길에서 담배피고 삥뜯는 일진 주제에 폼 잡는다'던가, 그리고 제 주변에서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것은 '사회적 약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폼을 잡는다'는 것입니다. 저도 주변에서 '한국 힙합'을 권유받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피타입'이란 래퍼가 자기 노래에서도 자학적으로 말했죠. <폭력적인 잡종문화>라고 불린다고.

근데, 기왕 제가 좋아하는 피타입 선생님 음악을 인용했으니까, 한 마디만 더 인용해봅시다. “경찰에게 총 맞는 친구는 없어도 / 억울하게 죽은 아이들은 많아 이렇게만 써도 / 무슨 애긴지 안단 게 슬픈 거야 / 한 단계 추락했지, 모두의 삶이 위험한 단계” 네, 미국 아프리카계 민족에게 있어서의 허슬(Hustle)은 한국 사람들이 하는 허슬과 다를 겁니다. 그러나 비교할 필요도 없이 모두 '고생'이라는 공통점이 있죠. '힙합'이라는 건 그런 '고생'을 이겨나가기 위한 '센 척'입니다. 불쾌할 수 있죠. 그런데 정말로, 정말로 '이 래퍼 좀 치는데?'싶은 래퍼들의 가사들을 들여다보면 읽어낼 수 있는 게 많습니다.

아, 한 가지 더. 확실하게 성소수자나 여성 등 약자를 비방함으로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래퍼가 존재하는 것은 맞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래퍼가 한국 힙합의 '전부'라기에는, 글쎄요. 한국 힙합은 넓습니다. 직접 괜찮은 음반을 찾아서 가사를 들여다 보세요. 개인적으로는 한국대중음악상 쪽에서 시상하는 음반들이 입문하기 좋았습니다.

#음악 #에세이

<무명의 별>은 출간 전부터 제가 '각'을 보고 있었던 작품입니다. '이 작품 느낌이 꼭 출간될 것 같은데?' 뭐 이런 느낌이 강하게 왔거든요. 골드코인으로 전 회차 구매하기는 했지만, 저는 모바일 E북 독서에 익숙하지 않은데다 제 리더기는 브릿G를 지원하지 않아서 읽지 못하고 방치해 놓고 있었습니다.

이시우 작가님은 '저랑 파장이 맞는다'고 느끼는 작가입니다. 첫 작품 <이계리 판타지아>를 쓰신 후에, <장르의 장르>라는 인터뷰집에서 (여기서는 필명 '왼손'으로 참여하셨습니다.) '어반 판타지'에 대해 이야기하시는 걸 봤을 때, '통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점에서 <무명의 별>을 발견했을 때 꽤 반가웠습니다. 마침 그 때가 제가 <청춘 환상 검무곡>을 연재하던 중이었거든요. 첫 장편이자 어반 판타지였습니다. 어느 정도 무협적인 요소들을 차용하려고 노력한 흔적도 있었구요.

작품 내용은 간단합니다. 현대 서울 ~ 통영을 배경으로, 어쩌다가 과외 선생님께 무공을 배운 권별과 산중노인의 무기로 길러진 무명이 만나 통영을 뒤집어 엎는 이야기입니다. 조금 <아라한 장풍대작전> 같아요.

처음 <무명의 별> 읽었을 때만 해도 저는 반가웠습니다. 그도 그럴게 E북 독서가 안 되어서 못 읽었던 작품을 종이책으로 만나게 되었으니까요. 읽는 내내 '아. 이거 빨리 읽어야하는데. 너무 재밌는데.' 하고 하루종일 이 책 생각만 했습니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사실이 그러합니다. <과외활동>을 두고 좋은 소설이라 했던 게 기억이 납니다. 그 다음에 <이계리 판타지아>를 읽었었는데요. 사실 <이계리 판타지아>는 제대로 못 읽었습니다. 작품 자체에서 '훅 끌어당기는 게 없다'는 느낌과 ⋯ ⋯ . 황금가지 편집부에서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조판이 읽기 불편했습니다. 글씨 크기가 너무 작았어요. 그러나 <무명의 별>은 <이계리 판타지아>와 <과외활동>을 거쳐 굉장한 작품이 나왔다는 생각을 하게 해 줍니다. 현대 한국을 배경으로 온갖 무협 클리셰들을 재해석해서 먹여줍니다. 죽은 스승에 대한 복수와 자신의 (무림인적) 정체성을 고민하는 캐릭터가 있구요, 이 앞, 백합 있습니다. 한국 종이책인데 백합이 매우 찐합니다.

다 읽고 놀랐던 건 서술기법입니다. 이 책의 화자는 미래의 권별이 과거사를 이야기하듯 되어있습니다. 사실, 무협적인 작품을 쓰다 보면 제일 난처한 건 '액션씬'입니다. '필살기' 쓰자니 이름이 구리면 난처하고, '세밀한 동작 묘사'를 하자니 흐름 깨지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걸 '기억을 더듬어 쓰는 식'으로 하면, 액션을 더욱 생생하게 독자에게 들려줄 수 있습니다. 덕분에 다양한 무공을 가진 조연들 또한 돋보입니다. 신선객 같은 캐릭터가 제 취향입니다.

다 읽고 드는 감정은 ⋯ ⋯ . 솔직히 말할까요. 질투입니다. 제가 <청춘 환상 검무곡> 쓸 때 이 작품을 발견했다고 했지요. 그때 안 읽어두길 잘했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품이 제가 지향했던 바와 굉장히 비슷합니다. 주인공으로 귀여운 여자애들 나와서, 무공으로 다같이 싸우고, 밥먹고, 놀고. 이 패턴을 반복하는 것. 어찌 보면 비슷한 주제의 두 작품인데, (출간연도로 세어서) <이계리 판타지아>가 7년 전 소설이니 8년차 작가님과 저의 수준 차이를 엿본 것 같달까요. '이걸 반도 못 따라가면서 작가 씩이나 되려고 했단 말이냐?'

그래도 질투를 조용히 쳐다보고 있으면, 속삭임이 들려옵니다. '그래서, 안 할 거냐?'는 거죠. 그럼 욕 한 번 뱉어주고 훌훌 털고 일어서야겠죠. 자기연민으로는 아무것도 못하니까. 생각해보면 무협은 대체로 그런 내용입니다. 떨쳐 일어서기 위해 무를 배우고, 나아가기 위해 협을 깨닫는.

#리뷰 #감상문 #소설 #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