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강 | MuKang

생각하고, 읽고, 그리고, 쓰고 가끔 차나 커피를 마십니다.

최근에 알라딘 북펀딩을 통해 영화 <헬레이저>의 원작인 <헬바운드 하트>가 출간되었죠. 제가 리뷰할 책은 그 작가 클라이브 바커가 쓴 한참 전에 출간된 단편집 <피의 책>입니다. 대충 2008년 전후쯤으로 여러 판본으로 출간이 되었던 책입니다.

왜 <헬바운드 하트>가 아니라 <피의 책>이냐구요. <헬바운드 하트>는 이제 막 나왔으니 구하고 싶을 때 구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펀딩을 보고, '아, 만약 이번에 저게 잘 팔리면 <피의 책>도 값이 오르겠구나' 싶어져서 값이 오르기 전에 미리 구매해뒀습니다. 아직 가격이 저렴하게 나와있다면 여러분들도 미리미리 구해두시기 바랍니다.

 

사실은 말입니다, <피의 책>은 전에 읽었던 적도 있고 해서 사두기만 하고 읽을 마음이 들 때까지 묵혀둘 예정이었습니다. 네, 원래 책은 사서 읽는 거 아니잖아요. 사둔 거 중에 읽는 거지. 스팀 라이브러리 같은 게, 아니 원래 그 원조 격에 해당하는 게 '내 서재' 아니겠어요.

묵혀둘 예정이었는데 갑자기 펼치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별 게 없습니다. 저는 원래 호러를 못 읽습니다. 못 읽는다는 건 무서워서 못 읽는다는 게 아니라, 재미를 못 느낀다는 사실입니다. 호러를 읽어도 거기서 의도하는 공포나 저 나름의 흥미를 읽어내지 못했었습니다.

작년만 해도 거의 무협에 가까운 작품을 쓰고 있었는데, 그때 주변에서 호러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저에게 '호러'라는 것을 이해시켜보려고 하셨던 게 생각이 납니다. 그때는 '그거 그냥 칼로 무찌르거나 (파훼법 같은 걸) 깨달으면 되는 거 아니냐'하고 전혀 받아들이지 못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데 갑자기 호러가 읽힙니다. 놀랍게도요. 최근에 취직해서 일을 시작한 탓일까요? 정식 근무 일주일차만에 '호러'라는 장르의 핵심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는 느낌이랄까요.

제 친구는 괴담이나 도시전설 같은 것이 '악의'에서 출발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좀 정확하게는 그것이 '출발점'이 악의라기보다는 '경유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출발점은 어디일까요. 그건 이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시스템입니다.

전화 통화를 한다고 합시다. 전화 통화 도중에는 '표정' '시선'이나 '몸짓' 등의 발화들은 모두 편집되어 잘려나갑니다. 통화상으로 듣는 음성 또한 실제로 만나서 듣는 음성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 편집되어 잘려나가 비어있는 공간에서, '이해 불가능성'이 발생합니다. 이 '이해 불가능한' 지점에서 '악의' 혹은 '생명의 위협' 등 공포를 느끼는 순간, 그 순간이 '호러'라는 장르가 발생하는 지점입니다.

네, 노동을 하면 이걸 몸으로 체감하게 되더라구요. 그래서 호러를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이쯤 딴소리를 했으면 '그래서 <피의 책>은 그럼 어땠는데?'하고 궁금해지실만도 합니다. <피의 책>은 상당히 거칠고 터프한 호러 단편집이었습니다. 환상성이 강하지만, 그 환상성은 세밀한 묘사를 통해 표현된 단단한 현실 위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다양한 단편이 가지각색의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은 지하철 도살자와 무기력한 주인공이 소위 '맞다이'를 까는 소설이라고 읽을 수 있겠습니다. <야터링과 잭>은 악마와 태평한 사나이의 한판 승부를 다룬 코미디 호러입니다. <섹스, 죽음 그리고 별빛>은 꼭 로버트 W. 체임버스의 <노란색 왕>을 떠올리게 하는 측면도 있는, 쇼에 관한 단편이구요.

이 소설들은 상당히 날것의, 폭력적이고 성적인 묘사를 가감없이 담고 있습니다. '차라리 영상으로 보는게 덜 잔인하겠다'는 느낌이랄까요. 선혈이 실시간으로 마구 낭자하는 영상보다는 꼭 마치 핏물이 튀어, 그것이 방울방울 말라가는 과정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이 단편집으로 미국에 발표된 것은 1984년으로, 슬래셔나 그런 영화들이 상당히 유행하던 시기입니다. 스래시 메탈 같은 것도 많이 연주되었구요. 지금 읽기에는 상당히 폭력적이라 분명히 취향을 탈 수 있는 책입니다. 불편한 부분도 많을 거구요.

그러나 무미건조함 속에서 사람이 점점 광기에 휩싸이고, 공포에 잡아먹혀 죽거나 혹은 '공포 그 자체'가 되어 다시 타인을 공포로 몰아넣는 상황이 되는 그 감각은 굉장히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읽기 전에 마음 준비 단단히 하고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드레스덴 파일즈> 시리즈가 한국어로 발간된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드레스덴 파일즈> 시리즈가 한국어로 발간된 적이 있단 말입니다. <드레스덴 파일즈> 시리즈가요.

라고 해도, 대다수는 정말 '그게 뭔데 오타쿠야'라고 하실 겁니다. 영미권에서는 정말 유명한 '하드보일드 마법사 탐정' 시리즈입니다만, 국내에서는 생소하기 그지없습니다. 미국 드라마판이라도 좀 인기를 얻었다면 말이 달랐을텐데, Sci-Fi 채널에서 시즌 1을 제작하기는 했습니다만 성적 부진으로 시즌 2는 제작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드레스덴 파일즈> 시리즈는 2020년에 17번째 시리즈가 나오고 18권째를 바라보고 있는 장기 연재 시리즈입니다. 한 권에 하나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영미 특유의 펄프 픽션 감성을 좋아해서, 저도 연재 방식만큼은 꼭 이런 스타일로 천천히 '권수 단위'로 책을 내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는 합니다.

 

그래서, 이 <드레스덴 파일즈> 시리즈가 한국에 출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2권까지나요. 2007년 두드림이라는 출판사에서 발매되었습니다. 첫 권의 제목은 <마법살인> (원제 <Storm Front>), 그리고 그 다음 편은 <늑대인간>(원제 <Fool Moon>)입니다. 왜 두 권 나오고 절판되었는지 아실 만한 번역입니다.

하지만 <마법살인>의 내용물을 보신다면 더 놀라우실 겁니다. 소설이 굉장히 유치하고, 낡았고, 너무 마초적이기 때문입니다. 작중에 나오는 마법은 동화에 가깝고, 배경이 되는 시카고의 갱단은 피상적인 느낌을 줍니다.

혹시 느와르 작가 중 '미키 스필레인'이라는 작가를 아십니까? 미키 스필레인의 <마이크 해머 시리즈>에 동심을 더한 느낌입니다. 등장하는 모든 여성 캐릭터는 나약한 게 주인공 해리 드레스덴에 홀려 있는 느낌인데다, 마법은 유치하며, 악당도 진부합니다. 당시 기준으로는 새로웠겠다 싶은데, 지금 기준으로는 이미 읽을 만한 책이 차고 넘칩니다.

 

사실 저는 읽다가 너무 마초적인 느낌이 강해 반발심이 들어서 읽기를 그만두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끝까지 읽어보았습니다. 뇌를 빼고 읽어지니까 정말로 독서가 되더라구요.

마초적인 부분은 굉장히 반발감이 들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이 굉장한 페이지 터너(Page Turner)라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주인공 해리 드레스덴이 늘어놓는 독백들은 유치하고 후지지만, 그럼에도 페이지를 계속 넘기게 되는 이유는 작품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들이 그를 좀처럼 놓아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느와르와 판타지의 결합 답게, 작품은 시작부터 굉장히 빠르게 핵심적인 사건을 보여주며 치고 들어옵니다. 일찍부터 붙은 불에 작가는 매 장이 끝날 때마다 장작을 넣고, 그 불이 식기가 무섭게 장작을 넣고 ⋯ ⋯ . 마침내 캠프파이어로 화르르 불이 타오를 때까지 자꾸 장작을 집어넣습니다. 게다가 이 캠프파이어가 생각보다 구조가 탄탄합니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꽤 장관입니다.

지금은 구하기 어려운 책이기도 하고, '어반 판타지' 장르의 시금석을 확인해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야 <마법살인>을 굳이 권하지는 않겠습니다. 3권부터 본격적으로 재미있어진다고는 하는데, 하필 한국에서는 2권에서 정식 발매가 끊어졌네요. 이해는 가지만 아쉬운 일입니다.

아일랜드노벨153호 <천상천하 유아독존 북부대공> – 브릿G

'재미있습니다'라는 말은 모든 작가가 듣고 싶어하는 표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듣고 싶다 못해 당연히 들어야 하는 말이라고 여기기까지 하는 작가들도 있습니다. 물론 간혹 젠체하기 좋아하는 작가들은 “재미있다는 건 통속적이라는 소리고.” 하고 볼멘 소리 하기 바쁩니다만 그네들은 그네들 나름의 문법이 있으니 무시하면 됩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북부대공>의 불가사의한 점이 바로 재미있다는 점입니다. 작가님이 이 리뷰를 읽으신다면 기분 나쁘게 들릴 걸 압니다. '재미가 있으면 있는 거지, 그게 불가사의까지 할 일인가.' 아니, 근데 잠깐만 들어보십시오. 가끔은 '이상한데' 재밌는 게 늘 있단 말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감상을 쓰는 사람으로서의 입장이란 말입니다.

 

예. 확실히 작가의 '서술'은 서투르고 급한 면이 있습니다. 조선 왕국의 시조인 '이성계'를 모티브로 했음이 분명한 '북부대공'인 '이성수'는 '대고려제국'의 남방인 '황산벌'로 내려와 '아기장군'이 이끄는 왜구를 무찌르고 있습니다. 검색해 보니 실제로 있었던 '황산대첩'이 모티브군요.

그리고 여기에 드워프와 트롤, 오크, 다크엘프가 가세한다는 미묘하고 기이한 점은 일단 후술할 것이므로 당장은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왜냐면 이 점은 오히려 매력으로 다가오는 면이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작가가 '직접 말하기' 식으로 설명을 하든, '보여주기' 식으로 드러내든 독자에게 납득시켜야 할 부분은 적지 않습니다. 작품은 원고지 19매 분량의 굉장히 짧은 일화만을 다루고 있습니다만, 당장 독자에게 납득이 안 되는 부분이 너무나도 많은 것입니다.

'북부대공'이라고 말해지는 이성수는 충분히 소개되지도 않았는데 '대고려제국 남부'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왜적들도 소개가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왜적들이 트롤을 동원하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정신이 아득해지는 측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갑자기 왜구의 장군으로 등장하는 아기장수는 '아기장수 설화'의 맥락을 독자들이 떠올리지 못한다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싶을 것입니다. 겨우 떠올린다 하더라도 이것이 적절한 배치인가,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 말입니다.

 

아, 근데 재밌게 읽었습니다. 이건 비웃음이나 농담이 아닙니다. 19 페이지밖에 되지 않지만 이 작품에는 순수한 재미가 있습니다. 조금 당황스럽고 어이가 없는 측면이 있지만, 그런 만큼이나 독자로 하여금 함박웃음을 짓게 만드는 면이 분명히 있단 말입니다.

첫째로 작품 자체가 순진하기 때문입니다. 작가 본인이 자신이 좋아하는 요소를 꾹꾹 눌러담아서 쓴 티가 확실히 납니다. '여말선초'라는 분위기에 작가 본인도 흠뻑 취해 있는 느낌이 독자로 하여금 기분 좋게 만듭니다. 감정에는 미숙함이 드러나지만, 그렇기에 겉만 번드르르한 꾸밈이 없습니다.

둘째 또한 작품의 순진함인데, 이는 '여말선초'를 좋아하는 것과는 궤가 다릅니다. 언뜻 보면 '여말선초'라는 배경에 어울리지 않는 '북부대공'이라는 어휘나 드워프와 트롤, 다크엘프들 말이죠. 조금은 이 친구들이 어디서 왔는지 알 것 같습니다. <워해머>(40K와 AOS, 판타지를 가리지 않고, 셋 다요.)의 느낌이 조금 납니다. 굳이 안 어울릴지도 모르는 요소를 강경하게 대놓고 넣은 것도, 이 요소들을 좋아하시기 때문이겠죠.

이 두 가지 '순진함'이 시너지를 일으켜서, 굉장히 강한 펑크 록 같은 효과를 냅니다. 그 점에서 굉장히 '재미있었습니다.' 창작의 본연 같은 걸 볼 수 있다는 점에서요.

 

장편 개작에 대해서 문의주셨는데, 사실 어떤 말씀을 드리기는 껄끄럽습니다. 왜냐면 다른 사람의 항해에 괜히 한 소리 했다가 배가 가라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면에선 자신의 항해 방식은 자기 자신만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구요.

그럼에도 이 두 가지는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는, 일단 끝까지 써 보면 본인이 알게 되실 거라는 겁니다. 무엇을 알게 될 지, 그래서 어떻게 해야할 지조차 그건 완결을 내 본 사람만이 압니다. 그 점에서 어떤 형태가 되었든, 끝까지 써볼 것을 한번 말씀드려보고 싶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천천히 하셨으면 하는 겁니다. 어차피 써야 할 팔자에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원래 창작자라는 인간들이 한 작품만 만들고 죽지 않습니다. 작품의 완결이 인생의 완결이 아니니까요. 조금 호흡을 길게 잡고, 천천히 마라톤하듯 완주하셨으면 하는 약간의 바람이 있습니다.

작가님이 오래 꾸준히 창작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왜냐면 창작을 이토록 좋아하시는 분이니까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자유 음악 웹진 TuneFragments에서 읽기

회색과 음악. 음악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색채 이야기를 꺼내는 건 안 와닿을 수 있겠다. 음악은 기본적으로 청각적 예술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누군가 청각 자체가 고막의 떨림을 통해 전해지는 예술이라고 주장을 한다면, 촉각까지는 그 감각을 연장시킬 수도 있으리라. 음악을 진정 좋아하는 사람 중에 음악을 듣다 '전율'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므로. 가사에서 문학성을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사를 들을 때의 이야기고, 뇌과학자들은 뇌파 이야기를 하지만 나는 거기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회색과 음악이다. 음악에서 색채라니. 공감각적 심상이라도 이야기할 셈인가. “푸른 종소리” “금빛 게으른 울음” 뭐 이런 교과서 시에서 나올 법한 표현들. 이 범주가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글쎄, 그렇게까지 큰 연관을 가지고 생각한 건 아니다.

내가 말하려는 건 조금 더 단순한 개념이다. 나는 음악을 들을 때 음반 단위로 듣는다. 30분 정도면 짧은 편이고, 50분이 넘어가면 너무 길며 40분에서 45분 내외가 딱 적당하다. 주로 영미권의 음악을 듣는 편이지만 (가끔 철이 돌아올 때마다 한국과 일본의 음악을 듣긴 한다) 장르는 크게 가리진 않는다. 락과 힙합 팬덤이 서로에게 눈알을 부라리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건 나와는 너무나도 상관없는 이야기다.

음반 선택의 지표로서 내 눈길을 끄는 건 몇 안된다. 그 중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은 음반의 커버, 혹은 재킷이라고 불리는 사각형의 사진 혹은 일러스트다. 나는 그 정사각형이 주는 느낌에 집요하게 집착한다.

 

어떻게 보면 정말로 앨범 커버는 필요없는 요소다. 총기가 가득하던 시절의 칸예 웨스트는 <Yeezus>를 발매할 때 아예 '앨범 커버'라는 개념을 빼고 음반을 발매한 적이 있다. '음악만으로 평가받겠다는 심리'를 이해못하는 건 아니다. 이젠 정말로 '음반', 정확히는 'LP'나 'CD' 혹은 '카세트 테이프'라는 '물성'에 기댈 필요가 없는 시대가 왔으니까.

이제 우리는 스트리밍을 통해 음악을 듣는 수준이 아니라, 유튜브를 통해 인디 아티스트의 신곡을 듣는다. Vylet Pony나 Louis Zong 혹은 Nobonoko 등은 자신의 채널에 싱글을 공개한다. 생각해보면 이 분야에서는 Microblank가 먼저였던 것 같기도 하다.

물성에 기대는 시대는 끝난 것처럼 보이고, '앨범 커버'라는 것도 이제 그 개념을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물론 각 아티스트들이 음원을 공개할 때 '썸네일'을 필요로 하는 것도 있으니 '앨범 커버'라는 게 사라질 일은 없을 것이다. 어쩌면 애플 뮤직이 '움직이는 앨범 커버' 시스템을 도입한 것도, 그런 '디지털함'을 반영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음반을 기억할 때 선율 다음으로 그 표지를 먼저 떠올린다. 그것의 '정확한 제목'이 무엇이었는지, 누구의 '정규 몇 집'이었는지는 그 다음에 떠오른다. 내 머릿속에서 음반의 '선율'과 '커버'는 하나로 이어져 있다.

이를테면 자기 사진을 떡하니 음반에 싣는 부류들이 있다. 가끔은 음악에 비해 사진 나온 게 촌스러워서 다른 커버로 바꿨으면 싶을 때도 있다. 잭 화이트나 노엘 갤러거의 솔로 음반이라거나, 주로 블루스 아티스트들이 그렇다. 몇몇 힙합 아티스트들도 그러는 편이다.

나는 그들을 이해한다. 그들에게 '음악'은 '자신의 음악'이므로. 음악을 해오며 형성한 에고가 스스로를 만들고, 그 스스로를 커버에 드러내는 것 뿐이므로. 그리고 커버가 실린 음반은 다시 자기 자신의 서사로 돌아온다. 완벽한 자신으로의 귀결이 아닌가?

사이키델릭 아티스트들은 조금 이해할 수 없는 초현실적인 총천연색의 색채를 싣는 편이다. 스토너나 둠 메탈을 보여주는 아티스트들은 거칠고 악마적인 색채를 커버에 담아낸다.

 

그리고, 돌고 돌아서 다시 회색이다. 내가 본격적으로 음반을 듣기 시작한 건 라디오헤드가 9집 <A Moon Shaped Pool>을 내고 길고 긴 침묵으로 돌아서기 전의 일이다. '달 모양의 연못'이라는 제목과, 심연으로 빠져드는 듯한 회색 소용돌이의 표지. 그때 라디오헤드가 보여줬던 음색은 직전 음반 <King of the Limbs>의 조용한 전자음에 영화적인 현악이 더해진 섬세한 선율이었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떤 저항감도 없이 심연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느낌. 폴 토마스 앤더슨이 감독한 <Daydreaming>의 뮤직비디오처럼, 어디론가 자꾸만 문을 열고 깊숙한 곳으로 내려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음반의 마지막 트랙인 <True Love Waits>는 미발표곡 상태로도 굉장히 자주 들었던 음악인데, 그 곡에 다다라서 나는 내가 찾던 무언가가 사랑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상태로 라디오헤드는 멈춰버렸다. 이따금 톰 요크나 에드 그린우드 등이 개인 활동을 하고, The Smile을 결성해 정규 음반을 3개나 발매했지만 그들은 중요한 때 중요한 과제에 침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뭣보다, 새로운 노래들은 <A Moon Shaped Pool>과는 달랐다. 그것들은 '회색'이 아니었으므로.

 

회색만을 엄청나게 찾아다닌 건 아니었다. 음악의 색채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부분도 많은데다, 음악의 색채가 꼭 회색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이를테면 화이트 스트라입스는 강렬한 빨강, 거기서 독립해 솔로 아티스트가 된 잭 화이트는 강렬한 파랑을 보여주는 편이다. 초기의 프란츠 퍼디난드는 강렬한 러시아 미술을 활용하고, 이에 반해 스트록스는 6번째 정규 음반 <A New Abnormal>에서 바스키야를 인용했다.

하지만 나는 어느 지점에서 항상 회색으로 돌아온다. 남의 빨간색이든 파란색이든 총천연색이든, 항상 그것은 내 퍼스널 컬러가 아니었다. 다양한 색채의 음반을 즐기다가도, 언제나 그것은 '내 음악은 아니다'라는 괴리감을 느끼는 것이다.

 

여타 다른 색이 그렇듯 회색은 다양한 음색을 담아낸다. 아마도 채도가 비어있는, 채도를 채워넣을 수 있는 색이기 때문일 것이다. Vampire Weekend는 <Modern Vampires of the City>에서 따뜻한 위로의 선율을 건넨다. 맥 밀러의 유고 음반인 <Circles>이나 데이먼 알반의 첫 솔로 음반은 <Everyday Robots> 유쾌하고 무기력한 스스로의 모습을 가감없이 드러내기 위해 회색의 색채를 사용한다.

회색은 힙합에서도 자주 쓰이는 음색이다. MF DOOM(무조건 대문자로 쓸 것)은 Madlib과 <Madvillainy>를 만들 때 회색을 사용했으며 Open Mike Eagle의 신보인 <Neigborhood Gods Unlimited>에서 회색을 사용했다. KA는 죽기 직전까지 회색의 단골 손님이었으며 켄드릭 라마까지도 회색을 벌써 두 번이나 사용했다.

그런가 하면 어떤 고딕하고 어두운 감정을 끌어내기 위해 사용하는 회색이 있다. PJ 하비, 닉 케이브 앤 배드 시드가 회색을 사용했으며 빌 에반스와 짐 홀도 <Undercurrent>에서 회색을 사용하지 않았던가.

 

회색 음반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무엇일까. 회색(Greyscale)은 흑백(Monochrome/Black & White)과도 다르다. 흑백은 차라리 선명함을 드러낸다. 대담함이고, 자신감이다. 검은색이 강렬한 만큼이나 하얀색 또한 그렇다.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은 스스로의 강렬함을 강하게 드러내기 위해 틱광둑의 흑백 사진을 활용했다.

회색은 흑백과는 꽤 닮았지만 다르다. 희뿌연 연기 속에서, 우리는 흐려진다. 흑백 논리를 거부하고 회색이 된 채, 이도저도 결정하지 못한 채 우리는 회색이 된다. 회색의 선율은 그런 흐린 우리 자체를 조명한다. 회색은 차라리 연약한 색채인 셈이다.

하지만 우리가 예술에, 선율에 바라는 것은 선명함 만큼이나 연약함과 모호함 아닌가. 회색의 선율이 가진, 자기고백에 가까운 우유부단함과 솔직함은 앨범의 표지를 경유해 우리에게 말한다. 괜찮다고.

끼앵끼앵풀 <이름> – 브릿G

TRPG 씬에는 유명한 농담이 있습니다. '엑스트라한테 이름 붙일 때 조심해라'는 농담인데 정말 겪어 본 사람만 압니다. 지나가던 단역 A인데 지칭어가 필요해서 '이름'을 부여했더니 생명력을 가지고 아득바득 엔딩까지 플레이어들과 동행하는 그 경험을 말이죠.

역할놀이 엑스트라와 이름의 관계도 각별한데, 소설 주인공과 이름의 관계도 그러하지 않을 리 없죠. 기구한 팔자나 성격의 캐릭터들은 저마다 특별한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평범하다면, 의도된 평범함(이름)과 특별함(그 캐릭터만이 가지는 과장된 특징)이 조화를 이루는 상태일 거구요.

만약 인용을 하게 되면 (이를테면 <오디세이아> 등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인용하는 수많은 작품들) 그 캐릭터는 인용된 대로의 삶을 살게 될테고, 의도적으로 비워놓는다면 그만큼이나 많은 의미를 가지게 될 겁니다.

제가 소설을 쓸때도 이름 관련으로는 웬만해선 조심하는 편입니다. 저같은 경우엔 최대한 의미를 담아내려 했었습니다. 이를테면 제가 <청춘 환상 검무곡>에서 썼던 주인공들 이름인 하양, 산새, 달래, 모란에는 제각기 모티브가 있었지만 솔직히 잘 살아나진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그 친구들은 제 이름대로는 산 것 같네요. 정확히는 이름이 주는 '느낌'대로요.

끼앵끼앵풀님의 작품 <이름>을 이야기하기 전에 뜬금 없는 잡소리부터 먼저 한 이유는, '이름'이라는 개념이 지닌 독특한 성격이 작품을 지배하기 때문일 겁니다. 이름은 날 때부터 타인에 의해 결정됩니다. 꼭 사람이 제 이름만큼의 삶을 산다는 보장은 없지만 매 순간 제 지칭어로 듣고 사는 것이 이름인데 그 존재감을 무시하고 살 수는 없을 겁니다.

이름 없는 소녀의 '카르마'로 얽힌 연자죄는 소녀의 상냥함을 무시하고 자꾸만 그녀를 가혹한 상황으로 몰아갑니다. 소사는 '파르바예'라는 가문의 이름에 짓눌려 스스로를 얽매어갑니다.

이름을 갈구하는 용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용'이 아니고 '용괴'인 이유는, 이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름이 없기 때문에 자아의 닻을 내리지 못하는 존재들. 어찌 보면 소사의 입장에서 그들이 괴물인 이유도, 전쟁병기에 불과한 이유도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름의 존재는 죄로 얽히고, 부재는 자아의 형성을 뭉개버립니다. 굴레는 자꾸만 얽혀갑니다. '이름'을, 스스로 살아갈 팔자를 결정할 수 없는 기구함은 읽는 사람의 감정을 슬픔으로 몰아넣습니다. 네, 그래서 소녀는 슬픈 거에요.

세밀한 묘사의 부재가 아쉬울 수는 있겠습니다. 이를테면 저는 생생한 묘사의 현장감이나, 혹은 따로 1인칭 시점을 설정해서 주절대는 것을 (혹은 둘 다를) 굉장히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저라는 독자 개인의 취향일 뿐입니다.

그러나 전투 장면의 묘사만큼은 꽤 박력이 있었고, 별 생각 없이 클릭한 작품에서 예상치 못한 서정성을 느꼈다는 점이 굉장히 매력으로 다가왔달까요. 끼앵끼앵풀 님의 <이름>은 좋은 황금 연휴 선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더 다크니스 2>는 이미 끝낸 지 작성일로부터 2주가 넘었습니다. 약 5시간에 달하는 짧은 플레이타임이었지만 상당히 재미있었습니다. 하지만 굳이 '일일이 감상을 남겨야 할까?'하는 의문에 굳이 감상을 남기지는 않았어요. 워낙에 단순한 게임이었으니까요.

스토리는 단순합니다. 악마 '다크니스'에게 빙의된 마피아 도련님인 재키가 '다크니스'를 노리는 '형제단'에게 공격당합니다. '형제단'의 습격에 재키가 복수하고, '다크니스' 안에 사로잡힌 자신의 연인인 제니를 구하는 내용입니다.

레벨은 레일로드로 진행됩니다. <더 다크니스 2>는 2012년 게임이고, 레일로드 슈터의 대표격인 <콜 오브 듀티 4 : 모던 워페어>가 2007년에 발매된 것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 있겠습니다.

이런 기본적인 '레일로드 슈터'의 런앤건 감각에 주인공에 빙의된 악마 '다크니스'의 각종 다양한 능력과 그 능력을 제한하려는 적들을 더해 높은 액션성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저는 '부머 슈터'라는 장르를 굳이 찾아 플레이하진 않습니다만, 꽤나 원초적인 형태의 '부머 슈터'가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습니다.

앞서 말했듯 <더 다크니스 2>는 5시간 남짓의 매우 짧은 플레이타임을 가지고 있고, 눈 앞에 보이는 적들을 다 쓸어버리는 매우 액션성 짙은 레일로드 슈터입니다. 물론 액션 FPS 게임으로서의 레벨 디자인은 훌륭합니다만, 굳이 이걸 감상으로 남겨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원래는 감상을 쓰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럼에도 감상을 쓰려는 것은 일단은 미결을 남기고 싶지 않아서가 하나이고, 나머지 하나는 <더 다크니스 2>가 제가 원하는 '어반 판타지'의 감각을 잘 녹여내고 있다는 점에서입니다.

<더 다크니스 2>는 Top Cow Productions, 현재는 Image Comics에서 판권을 보유하고 있는 만화책 시리즈를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만화책 시리즈는 90년대에 연재되었습니다.

90년대 픽션 씬은 어반 판타지의 황금기였어요. <샌드맨>이나 <헬블레이저> 같은 버티고의 간판 타이틀이 여기에 연재되었습니다. <버피 더 뱀파이어 슬레이어>와 그 외전 <엔젤>이 인기 드라마였고, <월드 오브 다크니스>와 같은 테이블탑 RPG까지 등장할 정도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익스트림(꼭 Extreme이 아니라 Xtreme으로 써야 합니다!) 열풍으로 과장된 근육과 유혈 묘사가 두드러지던 시기였습니다. <더 다크니스> 원작을 본 적은 없지만, 원작 만화는 어반 판타지와 익스트림 사이에서 꽤나 걸출한 컬트적 인기를 누린 것으로 추측됩니다.

<더 다크니스 2>는 카툰렌더링 그래픽을 기반으로 폭력적인 액션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액션 슈터입니다. 그러나 그 배경은 (적어도 미국인에게는) 친숙한 도시의 변두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레스토랑, 호텔, 창고, 혹은 정체불명의 매음굴이나 폐 놀이공원 같은 곳 말입니다.

적들인 '형제단'을 이끄는 악당인 '빅터'는 근래 본 악당들 중 가장 매력적인 악당들 중 하나였습니다. 물론 캐릭터의 동기야 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크니스를 빼앗아 그 힘으로 어쩌구 저쩌구 ⋯ ⋯ .'

하지만 빅터의 중요한 점은 그게 아닙니다. 빅터는 굉장히 지능적인 악당이며, 주인공인 재키보다 언제나 한 발짝 앞서가 있습니다. 빅터는 최종 대결에 이르기까지 무결점에 가까운 수준으로 재키를 농락하며, 때문에 빅터의 성격은 평면적임에도 상당히 강렬한 악당으로 다가옵니다.

마지막으로 역시 <더 다크니스 2>의 장점은, 단순히 '런앤건 FPS'가 전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언제든지 재키는 촉수를 휘두를 수 있고, 적을 휘감아 강력하고 잔혹한 공격을 퍼부을 수 있습니다. 물건을 집어던지고, 역병을 퍼뜨려 혼란을 일으키기도 하며, 심지어 무기를 강화하고 갑주를 입을 수 있습니다. 적들의 시체 가운데에 발생한 블랙홀을 집어던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재키에 대응하는 적들 또한 다양한 전술을 활용합니다. 재키의 '다크니스'와 관련된 능력들은 '빛' 아래에선 무용지물이기 때문에, 적은 광선을 재키에게 내리쬐려 합니다. 섬광탄을 던지고, 심지어 방패로 공격을 막거나 사슬을 휘둘러 무기를 가로채기도 합니다.

플레이타임은 상당히 짧습니다. 저는 5시간도 되지 않아 결말을 보았으니까요. 하지만 이미 고전게임이 되어버린 지금, 그리고 이런 '어반 판타지' 배경의 게임을 찾기 힘든 지금 <더 다크니스 2>는 한번쯤 저렴하게 구해서 플레이해볼 만한 괜찮은 게임입니다.

“도시의 이름은 '헬사렘즈 로트', 한때는 뉴욕. 하룻밤 만에 붕괴와 재구성을 거쳐 이차원의 경계가 된 도시는 지금 ⋯ ⋯ . 이계와 인접한 경계점, 지구상에서 가장 험악한 긴장지대로 변했다.

안개로 흐릿해진 도시에 꿈틀되는 암흑과학, 초상생체, 마도범죄. 한 걸음 잘못 디디면 현세는 침식당해 거스를 수 없는 혼돈에 삼켜지고 만다.

세계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암약하는 비밀결사 라이브라. 이 이야기는 그 구성원들의 싸움과 일상을 기록한 것이다.”

참으로 간결한 설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매 화를 시작할 때마다 나오는 이 짧은 문구야말로 이 작품의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이번에 읽은 작품은 <혈계전선> 원작 만화책 시즌 1입니다. 총 단행본 10권 분량으로 이 시즌 1의 내용을 기반으로 애니메이션 <혈계전선>의 시즌 1, 2가 만들어졌습니다. (단, 시즌 1의 '화이트'와 '블루' 시나리오는 애니메이션 오리지널입니다.)

<혈계전선>의 구조는 단순합니다. 쳐다보기만 해도 복잡하게 생긴 도시가 존재하고, 거기서 수없이 많은 일들이 벌어집니다. 당연히 거기에는 세계를 위협할 만한 일도 벌어집니다. 거기서 라이브라가 등장합니다. 라이브라의 활약 끝에 한 차례 위기는 끝납니다.

그러나 <혈계전선>은 일종의 픽스-업 단편 연작입니다. 세계와 캐릭터를 고정한 채 그 안에서 비슷한 플롯의 다른 내용들을 반복합니다. <미션 임파서블>을 짧은 템포로 반복하는 것이죠. 이 반복이 시즌 1의 전체적인 흐름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깔끔하지는 않을지언정 <혈계전선>은 난잡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혈계전선>의 플롯 구조는 정말로 푸가처럼 뚜렷한 테마를 지니고 주제부를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변화하는 도시와 사람을 짓뭉개는 커다란 사건과 사고들, 그럼에도 거기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혈계전선>은 제가 단언코 좋아하는 작품을 고를 때 가장 빠르게 생각나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어떤 점이 좋으냐 하면 글쎄요, 생각하기 힘듭니다. 좋아하는 점은 많습니다만, 딱 잘라 어디가 좋다 하기 힘든 총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은 총제적입니다. 물론 이 작품 안에 '최애캐'가 존재할 수는 있겠죠. 이 작품은 캐릭터가 백미인 작품이니까요. 제프라는 캐릭터를 좋아한다고 합시다. 이 캐릭터는 인간말종 난봉꾼입니다. 하지만 이 캐릭터는 독자적으로 난봉꾼이 아닙니다. 이 캐릭터를 제어하는 캐릭터(체인, 레오)가 있고, 라이벌이자 동료(제드)가 있으며, 그가 일하는 결사(라이브라)가 있습니다. 라이브라를 통해 그는 '헬사렘즈 로트'라는 세계와 관계를 맺고, 거기서 활약을 해 도시를 구합니다.

그러나 '헬사렘즈 로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시시콜콜합니다. 세계 정세가 왔다갔다한다는데 '시시콜콜하다'는 표현은 꽤나 맞지 않다 생각하실 수도 있으나, 저는 시시콜콜하게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헬사렘즈 로트'에는 이미 너무 많은 위기가 있고, 그럼에도 그걸 받아들이는 등장인물들의 태도가 시시콜콜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캐릭터 – 조직 – 세계 간의 사이가 굉장히 유기적입니다. 그리고 다양합니다. 라이브라만 해도 일곱이 넘는 개성적인 캐릭터가 있습니다. 디자인이 요즘의 가챠 게임들처럼 '과도하게' 개성적이지는 않습니다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만화책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어울립니다.

컷을 배치하는 실력도 남다릅니다. 만화책을 보신다면 대다수 컷에 배경이 생략되신 걸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심지어 도시의 풍경을 그릴 때에도 대다수의 배경은 안개 톤에 가려져 있습니다. 캐릭터 디자인이 부드럽고, 배경도 생략된 덕에 만화책을 읽는 동안 우리는 빠른 속도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속도감을 가속해가며 작가인 나이토 야스히로는 하이라이트에 이르러 맞쪽의 스플래시 아트, 그리고 필살기 이름 등으로 사건을 끝내는 기법을 자주 활용합니다.

그럼에도 질리지 않는 건, <혈계전선>의 '헬사렘즈 로트'라는 배경은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고, 거기다가 어떤 상상의 사건, 배경, 인물을 집어넣든 말이 되기 때문일 겁니다.

이렇게 좋아하는 점이 많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혈계전선>이 좋은 점을 딱 잘라 말해볼까요. 역시나 이 작품은 도시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개인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배틀물이 주류인 일본 만화들 사이에서, <혈계전선>은 다른 전략을 취하고 있습니다. 캐릭터들 간의 일상과 액션을 단편 연작으로 다루는 것입니다. 이 짧은 단편의 연속 안에서 캐릭터들은 사람을 압도하는 도시 앞에서 살아남고자 고군분투합니다. 그런 하루하루의 싸움이 일상이 됩니다. 그리고 그 일상이야말로 얻어낼 가치가 있는 것이죠.

<혈계전선>은 세계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암약하는 비밀결사 라이브라, 그 구성원들의 싸움과 일상을 기록한 것입니다.

하루가 영원히 반복됩니다. 루프가 이루어지는 섬에 갇힌 사람들이 그 루프가 반복된다는 사실을 축하하며 첫날을 보냅니다. 그 루프가 반복된 지 까마득하게 오래되었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린 채 말이죠.

콜트는 루프가 이루어지는 블랙리프 섬의 해변에서 아침에 눈을 뜹니다. 그리고 자기가 이 망할 루프에 갇혔고, 이 루프를 탈출하기 위해서는 '선구자'라고 부르는 8명을 '하루' 안에 모두 죽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실패한다면 또다시 아침의 해변에서 눈을 뜰테죠.

이 8명의 선구자들(한 명은 일종의 '침입' 요소인데다, 결과적으로 엔딩까지 가야 마주할 수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론 7명입니다)을 '하루' 안에 죽이는 법을 발견하기 위해 섬을 탐사하고, 초능력을 얻고, 총기와 장비를 갈아끼우며 루프를 반복하는 게임. <데스루프>를 플레이했습니다. 클리어에는 장장 27시간이 걸렸습니다.

저는 <데스루프>가 나오기 전부터 기대를 굉장히 많이 했습니다. 아케인 스튜디오의 게임이니까요. <디스아너드>를 홀린듯이 플레이하고 호불호가 갈렸던 <프레이>마저도 감명깊게 한 저는 <데스루프> 또한 제가 바라지 마지않는 게임일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데스루프>는 거의 예구였던가 첫 할인 때 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금 하다가 방치했죠. 그러다가 잊어버릴 때 쯤 재설치해서 플레이하고, 그리고 지워버리고, 다시 잊기 전에 재설치해서 조금 하고, 지워버리고를 반복했습니다.

게임에 문제가 있냐구요? 네. <데스루프>에는 확실히 문제가 있습니다. <데스루프>는 상당히 밀도가 높은 게임입니다. 음악과 미술은 아케인 스튜디오답게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기존에 아케인 스튜디오에서 시도된 적 없는 6070스러운 레트로 Sci-Fi 요소들이 잘 어우러져 있습니다.

캐릭터도 상당히 마음에 듭니다. 콜트와 줄리아나는 매 임무의 도입마다 쉴 새 없이 입담을 주고받습니다. 각 선지자들의 개성도 확고합니다. 섬을 탐험해서 발견할 수 있는 요소들도 많습니다.

저는 잘 모르지만, 아케인 스튜디오는 <데스루프>를 발표할 때 '건슈팅'에 포인트를 맞추었다고 발표한 모양입니다. 실제로 <데스루프>는 캐주얼한 건슈팅 게임에 가깝습니다. 어느 정도 로그-라이트의 요소도 갖추고 있기 때문에 하루를 반복하며 여러 아이템을 파밍 가능하고. 다양한 빌드를 테스트해볼 수 있습니다.

레벨 디자인? 말할 것도 없죠. 아케인 스튜디오니까요. 하루를 네 시간으로 나눠 한 번 동안 4개의 맵 중 하나를 선택해 탐사하게 되는데, 반복성이 높음에도 그 밀도가 다릅니다. 건슈팅 위주지만 충분히 잠입 암살으로 해결할 수 있는 구간이 있고, 실력과 창의력이 더해진다면 여러 창발적인 방법으로 복잡한 레벨을 돌파할 수 있습니다.

문제가 있다고 했죠. 네, 문제가 있습니다. 분명 하나하나 다 따로 떼어서 보면 밀도가 높습니다. 하지만 이 요소들은 제각기 빽빽할 뿐 그 이음새는 헐겁게 끼워져 있습니다.

작품은 하루를 4번의 시간(아침, 정오, 오후, 저녁)으로 나눠 매 시간마다 섬의 네 장소 중 하나를 골라 탐사할 수 있게 해 두었습니다. 이 시스템을 이해시키기 위해 게임은 꽤 긴 시간을 할애하고, 반복되는 시간 동안 아이템을 리셋시키지 않고 유지시키는 방법을 가르쳐주기 위해 시간을 할애합니다. 그렇게 사실상 튜토리얼만으로 5시간이 지납니다.

5시간이 지나고 나면 플레이어가 하는 일이라고는 선구자들을 하루 모두에 죽이고 탈출할 방법을 발견할 때까지 장비를 갖추며 섬을 탐사하는 것 뿐입니다. 이걸 반복하는 데 적이 '과하게' 귀찮으면 안되겠죠. 결국 적당히 장비를 맞추면 대부분의 레벨은 돌파가 됩니다. 레벨 디자인의 밀도는 높지만, 거대한 게임 시스템과의 이음매가 헐거운 것이죠.

섬을 탈출하려면 섬을 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탐사의 지표는 처음부터 가시적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끽해야 선구자가 지금 어디에 있으며, 숨겨진 유니크 무기를 어디서 발견할 수 있는지 정도지요. 선구자는 분명 매력적인 캐릭터지만, 그들의 뒷이야기는 섬을 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유니크 무기'와 '선구자'가 아닌 다른 요소들은 지표 자체가 거의 제공되지 않습니다. 메모 한 줄을 줄 뿐이니 직접 끼워맞추는 수밖에 없지요.

<데스루프>는 이런 점에서 플레이어들에게 '껍질을 깨고 알맹이를 맛볼' 것을 반복해서 강요합니다. 각 요소들간의 연결이 헐거운 편이지요. 하지만 각 세부적인 요소들은 밀도가 높기 때문에, 게임을 켜기 전부터 피로감이 상당합니다. 아트나 음악, 스토리같은 미적인 요소와 로그-라이트 건슈팅 게임적인 요소, 어드벤처나 내러티브 요소를 한꺼번에 신경써야 하는 게임이기 때문입니다.

상당히 많은 요소를 결합하려 한 '실험작'인 셈입니다.

하지만 저는 <데스루프>를 꼭 깨야겠다고 마음먹었고, 루프를 끝냈습니다. 아케인 스튜디오 오스틴 지부가 폐업한 이상 이 게임을 꼭 끝까지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데스루프>가 가지는 문제는 뚜렷하지만, 이 문제는 게임사의 실험에 의해 빚어진 문제이며 한번쯤 겪어볼만한 골칫거리였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쉬었다가 다른 게임을 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