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강

걷고, 생각하고, 읽고, 쓰고 가끔 차나 커피를 마십니다.

이웃사촌 아이스크림 트럭 희망세탁소

환상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민담에 대해서도 종종 이야기한다. 톨킨 이후의 정형화된 ‘가상 세계 판타지(혹은 우리 나라에서는 정통 판타지가 부르는 그것)’가 아니라, 좀 더 원초적인 것들을 이야기할 때, 이를테면 예이츠의 <켈트의 여명>이나 워싱턴 어빙의 <슬리피 할로우의 전설> 같은 것.

전자는 이야기 채록집이고, 후자는 엄연한 단편 소설이지만 둘을 비슷한 선상에 놓아도 될 것이다. 워싱턴 어빙이 단편은 유럽의 설화를 미국 이주민들의 세계에 불어넣기는 구조로 되어 있었으니까.

이러한 이야기들은 민족적인 신비와 경이감을 자아낸다. 믿기 힘든 이야기, 그러나 할머니 대대로 내려왔고 왠지 있을 법도 한. 그래서 무섭고 기이한. 이런 경이감과 경이감의 경계에서 환상은 태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시골에 살고 있지 않고, 민족이라는 말은 고리타분하게 느껴진다. 환상은 사라졌는가? 천만에. 어떤 낭만이 지워진 채 민낯을 드러냈을 뿐, 환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카프카의 <변신>이 그러한 작품이었다. 하루 아침에 벌레가 되어버린 노동자. <변신>은 엄연히 단편 소설이지만, ‘작가’가 뒤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더라면 또 모르는 일이다. 현대 사회의 기담으로 남았을지도.

요컨대 환상은 현대 사회에도 형태를 바꿔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디서 환상이 태어나는가.

과거에 역사적으로 채록된 자료집은 그저 박제된 채 남아있을 뿐이다. 박제된 자료를 그대로 소설에 쓸 수도 있겠으나, 꽤나 전투적이고 실전적인 작가라면 그 박제된 자료를 그대로 활용하지는 않으리라.

더 바깥으로 나아간 작가들은 직접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 또한 무에서 뭔가를 빚어내는 건 아니다. 그들이 포착하는 재료들은 조금 더 실전적인 감각과 이미지들이다. 밤에 산을 타고 흐르는 희무레한 것들은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 ‘슬렌더맨’이 되고, ‘팔척귀신’이 되고, ‘장산범’이 된다.

그 점에서 작가가 쓴 세 편의 단편들은 조금 더 바깥으로 나아간 경우다. <이웃사촌>은 층간 소음에서, <아이스크림 트럭>은 심야 아이스크림 트럭에서, <희망세탁소>는 세탁소에서 끄집어낸 환상이다.

작가는 이 세 편의 단편에서 강렬한 이미지(<이웃사촌>의 경우에서는 청각이겠다)를 활용한다. 도저히 문을 열 시간이 아닌데 장사를 하는 아이스크림 트럭, 기이한 현수막을 내건 세탁소. 강렬한 이미지와 마술적인 묘사로 독자의 시선을 잡아끈다. 그리고 이미지의 뒷면, 아무도 누구도 표정을 짓지 않는 스크린의 뒷면에 내동댕이친다.

눈길을 끄는 이미지와, 그 뒷면 사이의 경계 지대. 작가는 그 곳에서부터 환상을 쌓아올린다. 그리고 독자를 홀려 그 환상에 내동댕이친다. 그 기묘한 리미널(Liminal)함이 느껴지는 단편들을 읽어보는 건 어떤가.

#브릿G #소설 #리뷰 #감상문

잊었던 건지, 억지로 누름돌을 얹었던 것인지, 사람이 감정에 무디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감정에 일일이 휩쓸려서야 사람이 살아나갈 수 없기 때문이겠죠. 그러나 감정은 해소하기 전까지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쏟아내지 않았던 감정들은 사소한 계기로 다시 치솟아 오릅니다. 언제적의 감정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계기조차도, 오랜만에 읽은 무슨 잡지 때문일 수도 있고, 누군가가 건넨 레몬 카라멜 때문일 수도 있을 겁니다.

용복 작가님의 <레몬 카라멜 타임 슬립>은 그런 감정의 아련한 쇄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마술적 리얼리즘(Magical Realism)적인 미묘한 타임 슬립 요소가 있고, 호러 요소가 있습니다.

꽤 놀랐던 점은 이 작품이 부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작품 내에서 ‘부전시장’이라는 시공간은 지금도 실재합니다. 부산의 번화가인 ‘서면’ 근방입니다. 자주 가는 곳 근처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가본 적은 없는 것 같네요. 버스를 타고 지난 게 다일까요.

300번지도 실재했던 공간입니다. 작품을 읽어보고 나서야 ‘부전시장을 직접 인용하신 걸 보면 당연히 존재하거나, 그랬던 공간이겠지’하고 어림짐작했습니다만, 저는 이 공간의 존재가 의외였습니다. 첫째로 부전동 자체가 시내기도 하고, 부산의 문화를 다룬 어떤 서적에서도 300번지를 다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도 나오는 기록은 적고, 사진 기록은 더욱 적습니다.

부끄러운 역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그런데 부산역 차이나타운 거리 바로 옆에는 ‘텍사스거리’가 조성되어 있는걸요. 이 거리도 홍등가로 유명했던 곳입니다. 그에 비해 300번지는 사진 몇 장 남기고 잊힌 것 같아요. 어떤 것은 기록조차 남지 않아 쉽게 잊혀버리고, 어떤 것은 상품이 되어버립니다.

잊힌 것들이 몸부림치는 방법은, 역시 개인의 기억을 더듬는 것 뿐입니다. 개인의 기억을 더듬을 수 있는 수단은, 오로지 감각 뿐이구요. 오감. 시각과 청각 그리고 촉각, 그리고 맛과 향. <레몬 카라멜 타임 슬립>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어떤 역사에 대해 오감으로 몸부림치며 ‘이걸 나만 알았던 거야?’하고 소리지르는 짧은 엽편입니다.

조금 더 자료 조사가 많이 되어서, 분량이 길어 어떤 ‘자기주장’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지면을 얻었더라면, 작품은 방향성이 많이 달랐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이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졌을지, 아니면 작가적 에고에 매몰된 채 무용한 주장을 내었을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지금의 <레몬 카라멜 타임 슬립>은 이미 엽편으로서 충분한 것 같아요.

#소설 #브릿G #감상문 #리뷰

'읽기'는 여기서는 많은 걸 포괄하는 단어입니다. 굳이 서적뿐만 아니라 영화, 게임과 같은 종합 미디어나 심지어는 음악마저도 포괄하기도 합니다. 요즘은 미디어가 마구 쏟아지는 시대죠.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미디어를 읽어내기를 강요받습니다. 이번 주 넷플릭스 신작, 어떤 아티스트 신보, 너무 많이 보다 보면 결국 '뭘 볼까' 결정하는 단계에서 '로튼 토마토'나 '메타크리틱'같은 '비평가' 내지는 '큐레이터'에게 사고를 외주 주기도 하고, 뭐 그렇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고 쌩으로 부딪혀보는 사람도 존재하지요. 많이 읽다가도 불현듯 읽기를 멈추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유야 다양합니다. '읽을 여유가 없어서'가 대표적일 겁니다. '재미가 없어져서'도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취향이 있습니다만, 가끔은 취향이 사람을 잡아먹는 일도 존재합니다. “너는 SF를 좋아하니까, 이번에 나온 넷플릭스 신작 영화를 꼭 봐야 해. 그게 너를 구성하니까.”

어느 순간부터 '취향'은 일이 되어 사람을 갉아먹어요. 누구나 미디어를 감상할 때 취향 하나 쯤은 있습니다. “이 사람은 '호러'를 좋아하고, 저 사람은 '무협'을 좋아하니까 나도 하나쯤은 뭐가 있어야 한다.” 잘 갈고 닦아진 취향은 그게 없는 사람들이 보기에 멋있습니다. 질투가 날 정도죠. 그 결과 우리의 '라이오스 짤'은 무한정 확대 재생산되기에 이릅니다. “진짜 '드래곤 마니아'들을 보면 ⋯ 내 어중간함에 신물이 나 ⋯ !” 미친듯이 많이 읽는 게 장땡이라고 생각하던 순간이 저도 물론 있었습니다. 10대 ~ 20대 초 쯤은 '취향을 형성하는' 기간이라고 누가 말하더라구요. 한국 판타지 씬에서는 이영도에서부터 시작해서, 그 시절 신전기 라이트 노벨,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이 번역된다고 해서 3권까지도 읽어보고, 국내에는 없는 작품까지 읽어보려고 <디스크월드>의 야경꾼들을 다룬 파트나 아이튠즈 미국 계정까지 만들어 영상물을 구매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많이 보려고 한 이유라면 그야, 저는 그때는 '작가'를 할 거라고 굳게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한쪽에서는 무엇으로 먹고 살건 간에 다른 한 쪽에서는 '문필가'로 살 겁니다. 그건 그만두고 싶다고 그만둘 수 있는 건 아닐 거구요.

많이 본 걸 후회하는 건 아닙니다. 그땐 '컨텐츠'가 쏟아지는 속도가 지금같지 않았습니다. 물론 저야 과욕을 하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는 감당해 낼 체력이 되었습니다. 구매한 컨텐츠가 100이라 치면 거기서 할인이 반은 들어갔고 그 중 반은 읽었으니 남는 장사라 이겁니다. 근데 어느 순간부터 그게 '안 먹어지는' 순간이 옵니다. 사놓은 건 유통기한이 다 되어서 차마 못 보겠고, 새걸 사자니 구매할 여유도 사고 나서 읽을 여유도 안되는, 그런 순간이 옵니다. 보통 그때쯤 먼저 깨닫는 건 '내 취향의 작품을 모두 다 먹어볼 필요는 없다'는 걸 겁니다. <카우보이 비밥>이 전설적인 작품이라고 해서 모두가 그걸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야 <카우보이 비밥>은 그 세대 사람들이 그 세대에 맞는 방식 – 주 1회 24회 분량 – 으로 보았기 때문에 전설적인 것이지, 지금 세대 사람들이 굳이 <카우보이 비밥> 24화를 하루종일 몰아본다고 그때만큼 재미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요즘 느끼는 건, '취향을 다듬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남의 취향이 부럽다고 새로운 취향을 추가하거나, 무리하게 확장하는' 게 아니라 말이죠. 한동안 '남의 취향'을 질투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야 잘 다듬어진 취향은 그 사람의 '세계'니까요. 다른 사람들의 세계가 넓고 잘 다듬어진 걸 보면서, 왜 나는 저만큼 못 따라가나, 저런 세계 속에서 살아갈 수 없나 하면서 소외감을 느끼는 때가 있습니다. 사실은 지금도 조금은 그래요. 그때 필요한 건, 잠깐 뒤돌아보는 겁니다. 여태껏 뭘 읽어왔나, 어떤 세계를 봐왔나 하구요. 그러다 보면 불현듯 깨닫는 순간이 옵니다. 나는 먼 길을 왔고, 그 사람들과 방향이 달랐을 뿐이구나.

그래서 요즘은 예전에 읽었던 작품을 다시금 읽어보고 있습니다. <듀라라라!!>나 <마법사의 신부>라던가, 아니면 <존 윅> 시리즈 같은 것도 좋았구요. 마음같아서는 예전에 읽었던 <디스크월드> 원서를 읽어보고 싶은데, 영어 실력이 떨어졌을 게 뻔해서 읽는 게 무섭습니다. 더 어릴 때 취향으로 건너가서 <셜록 홈스의 모험>도 좋구요. 이렇게 되짚어가다보면, 슬슬 누군가 말 거는 목소리가 들려 옵니다. 그건 아마 아직 태어나지 않은 소설 속 인물들의 목소리일 겁니다.

#문학 #에세이

브릿G 끼앵끼앵풀 – <대화>

가끔 작가들은 작품이 작가와 독자의 대화라는 측면을 망각하고는 합니다. 굳이 직접적인 메시지의 주고받음이 아니더라도요. 덧글창에서 덧글로 한마디 남기기도 하고, 리뷰로 장문 감상을 남기기도 합니다. 작가 – 작가 간의 관계라면, 작품으로써 대화하기도 하겠죠.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게 이전에는 일방통행적이었을겁니다. 1900년대만 하더라도 러브크래프트와 위어드 테일스 작가진들 간에 '서신'으로 대화가 이루어졌고, 그 이전에 에밀리 디킨슨과 같은 시인은 방 안에서만 시를 쓰다가 죽고 나서야 남편이 그 많은 시들을 추려내 공개가 된 시인입니다.

이 작품에서 언급하는 <대화>와는 다른 이야기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상한 말을 하는 건, 최근에 고민하던 주제기도 하고 – 그냥 방에 틀어박혀 있다가 갑자기 나오고 싶어졌기 때문입니다. 리뷰어로 써야 할 리뷰가 밀리긴 했는데, 사실 그냥 4주 남은 거 쓰지 말고 보상도 포기할까 하고 있었는데, 별안간 작가님이 작성한 큐레이션에 선정되어서요.

소설이건 리뷰건 뭘 쓰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뭘 쓰라고 요구받지도 않는 상황에서 퍼진 채로, 사랑니 뺀 후유증으로 널브러져 있다가 별안간 리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대화>라는 작품 자체를 줄거리로 요약한다면, 별 내용 없을 겁니다. 안드로이드와 소년의 여행과 교감, 그리고 갑작스런 환경의 변화로 끝나버리는 작품입니다. '서사'라고 불러야 하는지도 의문입니다. (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작가님이 더 잘 아시겠지요.) 장편 소설의 서사보다는 뮤직비디오의 서사 같은 느낌이랄까요.

그러나 불러일으키는 감정만큼은 확실합니다. 소통불가능한 두 존재의 소통 시도. 저는 <윌-E>를 본 적 없지만, 마치 무성 영화를 보는 느낌도 드는 게 저 영화 생각도 나네요. 서사적인 역동감보다는 정적인 서정성을 강하게 드러낸 작품이라는 점에서 레이 브래드버리 느낌도 나는 작품이었습니다. 가끔 시처럼 소설을 쓰시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요즘은 폄하되는 기법이 있습니다. '말하지 않고 드러내기'는 한때 소설의 기본 기법이었습니다. 헤밍웨이는 이를 '빙산 기법'으로 불렀다죠. 첫 문장을 쓰고, 부연적인 묘사를 한 다음에, 첫 문장을 지워버립니다. 어떤 면에서는 영국식 농담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런 걸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소설에서는요. 영상에서는 그래도 살아있습니다. 예를 들어 <존 윅> 보는데 존 윅이 일일이 기술명을 외치면서 액션을 취한다면 폼이 다 떨어질 겁니다.

물론 만화적 측면을 살리기 위해서 거꾸로 이 방향을 취할 수는 있는데 그건 아무래도 방향성 자체가 다른 거니까요.

아니다, 사실 영상에서도 그다지 살아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매체는 갈수록 숏폼을 내세우고, 아마 <존 윅>을 극장이 아니라 스마트폰 크기의 모바일 화면으로 본다면 <무한도전> 자막 정도는 띄워줘야 볼 수 있을 겁니다.

웹 연재 소설은 그 여파가 제일 심하죠. 사실상 소설이라는 매체가 절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나서 부활한 셈인데, 웹소설이 출판소설의 문법과 같을 리가 없습니다. 그냥, 당장 말하는 게 좋습니다. 묘사는 커녕 설명조차 귀찮습니다.

사실 그 점에서 무협은 서술전략이 효율적이죠. 한자어니까.

그럼 그렇게 해야 돈이 벌리고 독자를 얻을 수 있으니까 모든 작가가 그렇게 써야 하느냐구요.

사실 그 점에서 제가 한동안 방에 틀어박혔던 것 같습니다. 제가 쓴 <청춘 환상 검무곡>이 첫 작품 치고 썩 나쁘지 않았다고는 주변에 말하고 다닙니다만, 그래도 모자람은 많은 작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뭔가 콩고물이라도 떨어지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더라구요. 정작 취직은 커녕 아르바이트도 아직 못 구했는데, 관성은 이미 당겨진 채라 갑자기 멈춰서니 굴러떨어지는 게 많이 아팠습니다.

제일 괴로웠던 건 옆사람에 대한 질투였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근처 사람들은 이미 작가로서든 학자로서든 데뷔해서 잘 나가고 있는데, 하다 못해 일자리라도 있는데 저만 멈춰 서 있다고, 그러니까 멈추지 말고 계속 글이라도 써야 한다는 괴로움이요.

그 사람들이 '어떻게 써야 한다'고 하는 말들을 듣는 게 제일 기가 꺾이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네. '말하지 않고 드러내기'는 바쁜 세태에 맞지 않는, 비효율적이고 고리타분한 방식일지 모릅니다. 그래서요?

요즘은 수많은 컨텐츠를 쳐내는 시대입니다. 쳐낸다는 말에는 세 가지 의미가 복합되어 있습니다.

쳐 많이 쏟아내다 쳐 많이 읽어내다 쳐 많이 튕겨내다

사실 이거 아니었는데 전에 써놓은 게 있었는데 지워졌어요. 아무튼 간에 이런 세태에 글이나 쓴다는 건 그 쏟아지는 컨텐츠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일입니다. 컨텐츠를 보고나면 그래서요. TV에 나오는 모 유튜버 누군지 모른다고 가족한테 말했더니 '넌 평범한 사람들과 스몰 토크 거리가 없니?'하고 갈구더라구요.

컨텐츠 보는 것조차 노동이 되어버린 시대에 '돈도 안 되는' 창작을 한다는 건 한가로운 일입니다. 그래서요. 그 한가한 순간을 위해서 일하는 게 아니었던가요. 그 한가한 순간을 남들과 공유하기 위해, '대화'하기 위해 창작을 하는 게 아니었던가요.

적다 보니 <대화> 자체랑은 상관 없는 글이 되어버렸네요. 쉬다가 갑자기 글을 쓰면 또 이렇게 됩니다. 큐레이션에 <대화> 말고도 다른 작품도 읽었는데, 유쾌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저도 부담 없이 다시 글 쓸 수 있을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브릿G #문학 #소설 #리뷰 #감상문

의외로 힙합을 자주 듣습니다. 물론 제가 좋아하는 건 재즈 힙합이나 클라우드 랩 계열입니다. 트랩이나 그라임이나 그런 건 좋고 나쁨을 평가하기 이전에 제 귀가 견디지 못하는 편입니다. 풍경에 어울리는 음악을 듣는다고 했지요. 소도시 풍경은 네온사인도 없을 정도로 한적하기 때문에, 강렬한 트랩 씩이나 듣고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좀처럼 '리스너 그룹'과 어울리질 못해서, 그 안에서 힙합 음반을 두고 어떤 평가가 이루어지는지 잘 알진 못합니다. 그래도 어림짐작은 가능합니다. 주로 해외 래퍼들 음반을 좋아하겠지요. 제가 그랬으니까요. 해외 래퍼들 가사까지 번역을 해가며 다 듣다가, 할 거 없는 사람들이 끝에 가서 한국 힙합을 들'었'을 겁니다. 더 옛날 '한국 힙합'이 없던 시절엔, '왜 없어? 그럼 내가 만들어야지.' 하는 사람들이 있었겠죠.

소설에서나 음악에서나 장르가 이식되는 과정은 늘 비슷했습니다. 무협이나 판타지 소설이 그렇습니다. 하이텔 등지에서 중국 무협 소설을 다 읽고 할 거 없는 사람들이 무협을 쓰기 시작한 것이라 들었고, 이영도 같은 경우에도 <반지의 제왕>이나 <로도스도 전기>니 하는 걸 구해 보다가 도저히 못 참겠다 싶어서 <드래곤 라자>를 쓰기 시작했을 겁니다. 그러니 '한국 장르'란 마이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식된 것인데다, 좋아서 하는 건데, '정말 먹을 게 없어서' 하는 것에 가깝거든요. 하는 사람들도 한줌단이라 이걸로 먹고 사는 것? 포기한 다음에야 가능합니다.

그 점에서 '한국 힙합'은 까내려지기 바쁩니다. 우선적으로 '토양이 맞지 않다'는 게 주된 비판점입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영혼을 한국인이 담아낼 수 있느냐'는 것이나, '그냥 길에서 담배피고 삥뜯는 일진 주제에 폼 잡는다'던가, 그리고 제 주변에서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것은 '사회적 약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폼을 잡는다'는 것입니다. 저도 주변에서 '한국 힙합'을 권유받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피타입'이란 래퍼가 자기 노래에서도 자학적으로 말했죠. <폭력적인 잡종문화>라고 불린다고.

근데, 기왕 제가 좋아하는 피타입 선생님 음악을 인용했으니까, 한 마디만 더 인용해봅시다. “경찰에게 총 맞는 친구는 없어도 / 억울하게 죽은 아이들은 많아 이렇게만 써도 / 무슨 애긴지 안단 게 슬픈 거야 / 한 단계 추락했지, 모두의 삶이 위험한 단계” 네, 미국 아프리카계 민족에게 있어서의 허슬(Hustle)은 한국 사람들이 하는 허슬과 다를 겁니다. 그러나 비교할 필요도 없이 모두 '고생'이라는 공통점이 있죠. '힙합'이라는 건 그런 '고생'을 이겨나가기 위한 '센 척'입니다. 불쾌할 수 있죠. 그런데 정말로, 정말로 '이 래퍼 좀 치는데?'싶은 래퍼들의 가사들을 들여다보면 읽어낼 수 있는 게 많습니다.

아, 한 가지 더. 확실하게 성소수자나 여성 등 약자를 비방함으로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래퍼가 존재하는 것은 맞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래퍼가 한국 힙합의 '전부'라기에는, 글쎄요. 한국 힙합은 넓습니다. 직접 괜찮은 음반을 찾아서 가사를 들여다 보세요. 개인적으로는 한국대중음악상 쪽에서 시상하는 음반들이 입문하기 좋았습니다.

#음악 #에세이

<무명의 별>은 출간 전부터 제가 '각'을 보고 있었던 작품입니다. '이 작품 느낌이 꼭 출간될 것 같은데?' 뭐 이런 느낌이 강하게 왔거든요. 골드코인으로 전 회차 구매하기는 했지만, 저는 모바일 E북 독서에 익숙하지 않은데다 제 리더기는 브릿G를 지원하지 않아서 읽지 못하고 방치해 놓고 있었습니다.

이시우 작가님은 '저랑 파장이 맞는다'고 느끼는 작가입니다. 첫 작품 <이계리 판타지아>를 쓰신 후에, <장르의 장르>라는 인터뷰집에서 (여기서는 필명 '왼손'으로 참여하셨습니다.) '어반 판타지'에 대해 이야기하시는 걸 봤을 때, '통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점에서 <무명의 별>을 발견했을 때 꽤 반가웠습니다. 마침 그 때가 제가 <청춘 환상 검무곡>을 연재하던 중이었거든요. 첫 장편이자 어반 판타지였습니다. 어느 정도 무협적인 요소들을 차용하려고 노력한 흔적도 있었구요.

작품 내용은 간단합니다. 현대 서울 ~ 통영을 배경으로, 어쩌다가 과외 선생님께 무공을 배운 권별과 산중노인의 무기로 길러진 무명이 만나 통영을 뒤집어 엎는 이야기입니다. 조금 <아라한 장풍대작전> 같아요.

처음 <무명의 별> 읽었을 때만 해도 저는 반가웠습니다. 그도 그럴게 E북 독서가 안 되어서 못 읽었던 작품을 종이책으로 만나게 되었으니까요. 읽는 내내 '아. 이거 빨리 읽어야하는데. 너무 재밌는데.' 하고 하루종일 이 책 생각만 했습니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사실이 그러합니다. <과외활동>을 두고 좋은 소설이라 했던 게 기억이 납니다. 그 다음에 <이계리 판타지아>를 읽었었는데요. 사실 <이계리 판타지아>는 제대로 못 읽었습니다. 작품 자체에서 '훅 끌어당기는 게 없다'는 느낌과 ⋯ ⋯ . 황금가지 편집부에서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조판이 읽기 불편했습니다. 글씨 크기가 너무 작았어요. 그러나 <무명의 별>은 <이계리 판타지아>와 <과외활동>을 거쳐 굉장한 작품이 나왔다는 생각을 하게 해 줍니다. 현대 한국을 배경으로 온갖 무협 클리셰들을 재해석해서 먹여줍니다. 죽은 스승에 대한 복수와 자신의 (무림인적) 정체성을 고민하는 캐릭터가 있구요, 이 앞, 백합 있습니다. 한국 종이책인데 백합이 매우 찐합니다.

다 읽고 놀랐던 건 서술기법입니다. 이 책의 화자는 미래의 권별이 과거사를 이야기하듯 되어있습니다. 사실, 무협적인 작품을 쓰다 보면 제일 난처한 건 '액션씬'입니다. '필살기' 쓰자니 이름이 구리면 난처하고, '세밀한 동작 묘사'를 하자니 흐름 깨지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걸 '기억을 더듬어 쓰는 식'으로 하면, 액션을 더욱 생생하게 독자에게 들려줄 수 있습니다. 덕분에 다양한 무공을 가진 조연들 또한 돋보입니다. 신선객 같은 캐릭터가 제 취향입니다.

다 읽고 드는 감정은 ⋯ ⋯ . 솔직히 말할까요. 질투입니다. 제가 <청춘 환상 검무곡> 쓸 때 이 작품을 발견했다고 했지요. 그때 안 읽어두길 잘했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품이 제가 지향했던 바와 굉장히 비슷합니다. 주인공으로 귀여운 여자애들 나와서, 무공으로 다같이 싸우고, 밥먹고, 놀고. 이 패턴을 반복하는 것. 어찌 보면 비슷한 주제의 두 작품인데, (출간연도로 세어서) <이계리 판타지아>가 7년 전 소설이니 8년차 작가님과 저의 수준 차이를 엿본 것 같달까요. '이걸 반도 못 따라가면서 작가 씩이나 되려고 했단 말이냐?'

그래도 질투를 조용히 쳐다보고 있으면, 속삭임이 들려옵니다. '그래서, 안 할 거냐?'는 거죠. 그럼 욕 한 번 뱉어주고 훌훌 털고 일어서야겠죠. 자기연민으로는 아무것도 못하니까. 생각해보면 무협은 대체로 그런 내용입니다. 떨쳐 일어서기 위해 무를 배우고, 나아가기 위해 협을 깨닫는.

#리뷰 #감상문 #소설 #문학

소설에 있어 장르란 주제이자 질문입니다. 작가가 어느 '장르'를 선택하는 순간, 작품의 주제는 그 장르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로 소급됩니다. 특히나 그 장르가 고착화되고 단단한 장르라면요. 특히나 무협이 그렇습니다. 무협은 저에겐 여전히 단단한 장르로 여겨집니다. '무'에 해당하는 무술과 액션이 있어야 하고, 그 무를 통해 '협'을 실천하는 장면들이 필요합니다. 이 과정에서 작가가 필연적으로 대답해야 하는 질문은 '무엇이 협이냐'는 겁니다. 칼을 휘둘렀으면 뜻이 있어야겠지요. 그 뜻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칼까지 휘둘러야 합니까? 협은 그 합리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 협이 작가는 물론이고 독자까지 납득시킬 수 있게 되면, 사람들은 그 협을 휘두르고 다니는 사람을 '협객'이라 부를 겁니다.

무협에 비하면야, 판타지는 자유로운 장르라 할 수는 있겠습니다. 그저 '환상'만 존재한다면야 판타지는 판타지입니다. 신화적인 존재나 마법이 등장하지 않아도 판타지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런 존재들을 대놓고 등장시킨다 하더라도 '신비성이 떨어진다'고 욕하는 '판타지 대법관'따위 없습니다. 모 친구는 그런 점에서 <베테랑 2>는 판타지 아니냐고 하더라구요. 서울 한복판 폐건물에서 도박판이 벌어지고, 어딘가엔 마약굴이 있고, 자경단과 정의구현 유튜버가 있는 곳. 완전 판타지 아니냐는 겁니다. 물론 '매대'에 이런 걸 '판타지'라고 올렸다가는 큰일나겠으나, 저는 또 틀린 말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판타지의 환상은 자유로운 만큼이나 그 '환상'이 무엇인지 작가가 정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치 협객 안에 내재된 '협'이 무엇인지 독자에게 (이야기의 형식으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요. 환상의 형태는 다양합니다. 현실인지 환상인지 긴가민가한 내용을 환상이라고 한다면 '마술적 리얼리즘'의 형태로 불릴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검과 마법을 드러낸다면 '소드 앤 소서리'로, 어둡고 암울한 세계를 보여준다면 '그림다크', 동화스러운 세계를 보여준다면 '메르헨' ⋯ ⋯ . 네, 사실 말이야 전부 그냥 가져다 붙이기 나름입니다. 그러나 말이 존재한다는 것은, 요점을 정리해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 물론 그렇다고 요점만 가져다 붙이면 재미가 없죠. 그건 소설이 아니라 요점 정리니까요.

사실 판타지라는 것 자체가 '가상'을 만들어내고 향유하면서 발전했습니다. 루이스나 톨킨부터가 자기들의 영문학적, 신화학적 지식을 총동원해 '나니아'나 '레젠다리움' 세계관을 만들었으니까요. 그 다음에 잠시 등장했던 것도 '란크마르'라는 대도시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누군가는 실존하는 역사에 가상을 덧씌우기도 했죠. 그러니까, 결국 판타지라는 건 뭘 하든 판타지를 하고 생각하고 있다면 판타지입니다! 굉장히 DIY적이고 펑크한 사고방식이죠. 그러나 단 한 가지. 이것만큼은 늘 생각하게 될 거에요. 나는 어디에 있었는가? 그리고 앞으로 어디로 가게 될 것인가? 고작해야 학술적인 지식은 이런 '지도'를 만드는 데 많아야 3할 정도의 도움밖에 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자기만의 뭔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책을 통해서 답을 얻는 게 아니라 나가서 배워 얻어야 하는 것이니까요.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자기만이 알 수 있겠죠.

#문학 #에세이

요즘 카페 면접을 보러 다니면 꼭 듣는 소리가 있습니다. '전공이 커피가 아닌데 왜 갑자기 카페 아르바이트를 찾으시나요?' 그런 질문을 들을 만도 한 것이, 제 아르바이트 이력에 카페 이력이라고는 한 줄도 없고, 고작해야 '한국커피협회 바리스타 2급 자격증' 정도가 다입니다. 바리스타에게 있어서 중요한 건 고작 자격증보다야 경력사항인 바, 일할 사람을 뽑는 사장에게 있어서는 궁금할 만도 하겠죠. 보통은 '원래 작가 등 다른 일을 하다가 생업을 구하고 있다'하는 식으로 둘러대면 아~ 하고 넘어가주는 편입니다. 부산은 그래도 스스로를 '작가'라고 소개하면 '아우라'를 얻을 수 있는 환경이긴 합니다. 게다가 관련 대학의 관련 학과를 나왔으니, '음, 당연히 그렇겠군.' 하는 식으로 넘겨보낼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처음의 질문은 이런 의미도 내포하고 있을 겁니다. '어쩌다 커피를 좋아하게 되셨어요?' 그러게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은 맥심이나 카누 한 스틱 정도로 만족합니다. (다만 다른 곳에서 '맥심' '카누'를 초과하는 뭔가를 찾으려 하겠죠.) 그런데 왜 저는 굳이 커피를 좋아하게 되었을까요. 이렇게 분석할 수는 있겠습니다. '창작 또한 노동이고, 노동에 있어 카페인은 필수품이기 때문이다.' 맞는 말입니다. 저는 음료가 없으면 제대로 뭔가를 하지 못합니다. 커피든, 차든, 아니면 아예 허브티나 따뜻한 물이든 마실 게 있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게임은 커녕 인터넷 수다조차 제대로 못 떱니다.

어떤 연구자가 말하기를 '야, 글 쓰는 새끼들은 꼭 글 하나만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꼭 하나 더 해. 술을 하거나, 커피를 하거나, 향을 하거나 말이야.' 단순히 글을 쓰는 것 외에 고급 취향이 하나 더 있는 셈입니다. 오노레 드 발자크가 글을 쓸 때 커피를 줄창 마셔댄 일화는 유명합니다. 정 안 되면 커피 가루를 씹어대기도 했다고 해요. 그런가 하면 바흐는 커피를 소재로 '커피 칸타타'를 작곡했죠. 저는 커피 하면 생각나는 문인들은 늘 경성의 작가들입니다. 이상, 구보와 구인회들. 이상은 직접 근대기의 커피 가게라 할 수 있는 '다방'을 운영했죠. 그러나 경영 수완이 나빴기에, 다방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었던 개화기에도 사업을 여러 차례 말아먹고 맙니다.

저 말고도 다른 작가들도 뭔가를 마셔 댑니다. 누군가는 '일본의 작가들은 술, 담배, 커피를 셋 다 한꺼번에 해댔고 그 결과 미친듯이 창작을 할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헤밍웨이가 모히또와 다이키리를 좋아한 것은 마케팅을 위한 거짓말이지만, 그의 소설에 김릿이 등장하는 것 자체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업 도중에나 쉴 때 뭔가를 마신다는 건, 단순히 카페인 활성화도 있지만 저에겐 성찬식에 가까운 무언가이기도 합니다. 한 잔은 이상에게, 한 잔은 구보에게, 한 잔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에게. 물론, 이 모든 건 거짓말일지도 모릅니다. 그냥 아르바이트 구하다가 잠깐 생각난 것일지도 모르죠.

#에세이 #커피

록은 죽었다고 다들 말하기는 합니다. 록의 저항 정신이 죽은 것인지, 음악성이 죽은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단순히 록을 좋아라 하는 사람들이 줄어든 것일지도 모르겠지요. 혹은 뭐만 하면 '예술의 종말' 타령 하는 사람들이 겁을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만 해도 록을 좋아하지 않는 게 사실입니다. 아, 싫어하는 건 아닙니다. 한때 좋아했었던 장르기도 하구요. 오아시스를 필두로 한 브릿팝이니, 너바나와 그런지니 뭐니를 이미 두 밴드의 전성기를 이삼십 년쯤 지난 때, 그것도 한국에서 이야기하기도 했던 걸요.

제가 좋아했던 록은 이미 '얼터너티브화'된 락이긴 합니다. 그 이전에는 '하드 록'이나 '헤비 메탈'이라고 레드 제플린이니 퀸이니 하는 밴드들이 커다란 곳에서 엄청난 솔로 연주를 선보이는 음악들을 했었죠. 저는 그런 걸 현장에서 본 적 없습니다. 부산 록 페스티벌도 한 두어 번 정도 간 게 다인 걸요. 요즘 사람들이 듣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아이돌 음악이나 전자 음악은 애니메이션 서브 컬처에 잘 파고들었습니다. 로우-파이 힙합 플레이리스트는 도시인의 수면제로 자리 잡았습니다. 음성 합성 엔진과 짧고 강렬한 선율로 숏폼에 잘 파고 든 음악들이 히트하기도 합니다. 이를 두고 '옛날의 음악'을 좋아하던 사람들은 '사람들이 그런 거나 듣다니 암울한 시대다' 하고 불평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앨범을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하게 정주행하던 시대가 갔다면서요.

저는 사실 조금 끼인 느낌입니다. 앨범 정주행, 합니다. 그러나 스트리밍으로 무제한 제공받은 탓인지, 앨범 정주행을 하면서도 앨범에 대한 경외감보다는 '앨범 시간'을 많이 봅니다. 앨범 길이가 45분 안팎이면 산책 한 바퀴 돌면서 듣기 최적입니다. EP가 대세가 된 지금은 훨씬 더 짧은 음반들이 많더라고요. 30분도 안 되는 음반이 많습니다. 더 짧은 거리를 이동할 때 듣기 좋겠지요. 이렇게 걸을 때 귀에 거는 이어폰이나 헤드폰이 그렇게까지 좋을 수는 없습니다. 좋은 건 집에 모셔놔야죠. 온이어 헤드폰을 끼고 걷거나, 카페에 앉으면 귀에 잡음이 섞여 듭니다. 보통은 그런 잡음이 싫어서 '노이즈 캔슬링'을 쓰시는 분도 있지만, 저는 그런 걸 쓸 형편이 되지 않아서 그냥 다닙니다.

그러면 귀에 제일 먼저 들어오는 건 뭘까요, 드럼입니다. 미묘한 박자감을 안겨주는, 드럼 말입니다. 드럼은 도시의 소음으로부터 사람을 지켜주는 부적이자, 도시를 즐기게 해주는 박자감입니다. 선율은 단순하더라도 괜찮습니다. 이미 도시는 고작 음악으로는 감출 수 없이 시끄러우니까요. 단순했던 도시의 소음은, 느리고 침착한 드럼 루프를 만나 힙합의 랩과 같은 선율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은 과거의 90년대 얼터너티브 록보다는 좀 더 박자감 있는 음악들을 많이 듣습니다. 재즈 붐뱁이나 로 파이 힙합이 좋습니다. R&B와 소울은 힙합의 사촌이라, 그 느린 박자감이 좋습니다. 록을 듣더라도, 블루스 성향이 짙은 록은 록이라기보다는 로큰롤 같아서 강렬한 그루브를 선사합니다. 아니면 챔버 팝 같은 실내 현악을 사용하는 것도 좋아요. 현대적인 그루브와 만나서 도시의 소음으로부터 피할 공간을 만들어주는 느낌입니다.

전자음악을 듣지 않는 건 아닙니다. 90년대에 등장했던 트립 합이나 정글, 브레이크비트는 현대 힙합의 대선배지요. 다만 신스웨이브는 밤이 아니면 못 듣겠습니다. 이 동네는 네온사인이 많이 없거든요.

#음악 #에세이

브릿G 장편소설 <이룰루양카스의 딸>

처음 이끌린 것은 <블러드본>을 연상케 하는 제목과 소개글 때문이었을 겁니다. <블러드본>에는 '우주의 딸 이브리에타스'라는 보스가 존재하는데, '딸'이라는 표현과 '이'로 시작해 '스'로 끝나는 여섯 글자의 '신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헷갈린 듯 합니다. 게다가 '월귀'에 대한 언급까지. 그러나 실제로 '이룰루양카스'는 히타이트 신화에서 등장하는 환수라고 하는군요. 이 소설은 그렇다면 히타이트 신화를 소재로 한 작품일까. 글쎄요. 여기에 대해서는 있다가 이야기합시다.

RPG 게임에서 '소환'이라는 개념이 밀려난 지는 꽤 오래되었습니다. 이는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엔 대여점 게임 판타지 소설에서도 '정령사' 내지는 '소환사'라는 존재를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만, 이제는 '환상의 무언가를 소환하는 직업'은 주류에서 밀려난 듯 합니다. <이룰루양카스의 딸>은 요즘은 국내 판타지계에서 쓰이지 않는 듯한 '소환사'와 '환수'를 주제로 한 소설입니다. '백악나무'와 '황도'의 적인 '월귀'가 등장하는 등, 작품의 전반적인 배경은 <다크 소울>, <블러드본>이나 <엘든 링> 같은 '프롬 소프트웨어'의 게임들을 참조한 듯한 느낌입니다.

그 점에서 앞부분만 조금 들춰보았을 때, 처음 생각한 단어는 '그림다크(Grimdark)'가 아닌가 하는 의아함이었습니다. '그림다크'는 말 그대로 어둡고 암울한 세계를 다룬 판타지 소설입니다. <워해머> 시리즈나 <왕좌의 게임>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의미 없이 죽어나가고, 폭력적인 장면이 난무하는 작품군 말입니다. 그러나 읽을 수록 그것도 딱히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얌 말도고 다른 여성 캐릭터가 여럿 나하르 주변에 등장할 때 느꼈습니다. 아, 라이트노벨이구나. 그것도 이 스타일은 한 80년대 ~ 90년대 스타일에 가깝구나. 네, <슬레이어즈>나 <로도스도 전기>. 그런데 사실 저는 그 두 작품은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도록 하죠. <드래곤 라자> 닮았다고. 세계관은 '프롬 소프트웨어'의 작품들을 닮은 '다크 판타지'고, 캐릭터의 티키타카는 <드래곤 라자>를 닮았습니다. 소환사와 환수의 이야기는 꽤 옛날 스타일입니다. 세계관은 상당히 새로운데, 작품의 성향은 많이 올드합니다.

그러나 이 올드함은 어떤 의미에서는 기획된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수많은 '신화'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강'인 나하르와 '바다'인 얌. 고대 신화에서 얌과 나하르는 '혼돈의 상징'이라고 하네요. 그 외에도 '황도 12궁'이나 오딘 등 '세상에 존재하는 신화적 존재들의 이름'을 다 끌어모아서 '키친 싱크(Kitchen Sink)'에 가까울 정도로('키친 싱크'는 기법의 이름입니다. 주방 붙박이 빼고 다 끌어모았다는 뜻이지요.) 나열한 다음 중요한 역할을 부여합니다. 이는 특히 '환수'를 다룰 때 그러합니다. 이프리트, 골렘 등 이미 우리에게는 익숙한 이름들이 등장합니다. 왜 굳이 그랬을까요? 굳이 설정 페이지를 따로 마련하신 걸 보면 정답은 의외로 간단할 지도 몰라요. 일곱 용과 일곱 속성. 환수 간에 '상성'이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작품은 '놀이'의 감각으로 쓰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점에서 아쉬운 점이 있어요. 좀 더 작정하고 '놀았으면' 좀 더 재밌지 않았을까. 주인공의 여정과 성장에 집중하는 것보다 좀 더 환수들이 날뛰는 소설이 되었으면 어땠을까, 더 재밌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없진 않습니다. 그러나 <이룰루양카스의 딸>은 지금도 충분히 재밌는 작품이라는 말도 덧붙이고 싶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는 '재밌어지려는 단계'를 밟아나가는 작품이요. 2부가 기대되는 작품입니다.

#브릿G #문학 #소설 #감상문 #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