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강 | MuKang

생각하고, 읽고, 그리고, 쓰고 가끔 차나 커피를 마십니다.

아타나시우스 키르허. 17세기 예수회 수도사였던 그는 이집트학에 정통하여 1633년에 콥트어를 배웠고 1636년에 콥트어 문법책을 출판했다. 1650년에서 1654년 사이 그는 콥트어 연구와 연관된 이집트 상형문자의 번역을 출간한다.

후세에 로제타 스톤이 발견되고 나서 이집트 상형문자에 대한 키르허의 연구는 어처구니 없는 상상의 소산으로 밝혀지게 된다.

 

상상의 소산, 창작물. 회화, 음악, 거기에 소설까지. 예술가는 창작에 매달려 살아가며 작업이야말로 경건한 하나의 종교적 행위로 간주한다. 오로지 해야 할 것은 작업뿐이다. 창작만이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이며, 창작이 없는 세계는 의미를 잃는다.

창작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단순하다. 재미있어서. 나만의 세계를 가진다는 행위 자체가 원초적인 재미를 불러 일으켜서. 머릿속으로 상상한 풀잎 하나 하나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고, 불어오는 바람의 온도나 비가 내리는 모양새에 별명을 붙이는 게 좋았다. 나름대로의 테라리움을 만들고, 하루종일 그 안에 있는 게 좋았다.

그 테라리움을 만드는 데에는 재료가 필요하다. 고흐는 언제나 좋은 그림을 그리는 데 재료가 들어서 정작 작품을 팔고 나면 남는 게 없다는 한탄을 했다. 똑같은 경험을 했다. 좋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흡사 고고학을 하듯 다른 창작물을 파내려갔다. 금전적으로는 항상 손해를 볼 뿐이었다. 모 사람이 말하기를 그렇게 파내려가다가는 모라토리엄밖에 선언할 게 없을 거라고 충고했지만 나는 지금도 멈추기가 어렵다. 그저 디폴트의 속도를 늦추려고나마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테라리움을 일구기 위해 일이 필요했다. 남들처럼 번듯한 직장은 아니어도 좋을 거라고, 창작을 위한 시간을 확보할 수만 있다면 적당히 아무 일이라도 상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순진했나? 아니면 나약했을지도. 가족들에겐 한 달도 안 되어서 그만둔다고 타박을 들었다.

더 나쁜 건 그만둔다고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놈의 창작은 돈이 되어주지 않는다. 돈을 위해서 창작하는 건 비루한 거라고 거장들은 말하곤 하지만, 이젠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원하는 걸 만들기 위해서는 새 일자리가 필요하다. 새 일자리가 더 나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굴레에 갇혔다는 걸 깨달았다. 사랑할 수 없는 일을 하고, 무의미한 하루를 반복하다가 퇴근 후에 반짝 창작을 하며 깨달음을 얻고, 다시 매일매일을 반복한다. 깨달음은 산산이 조각난다. 빠져나갈 수가 없다.

모르겠다. 죽어야 하나? 보통 누구 하나 죽는 게 루프를 끊어내는 방법이던데. 참을 인 세 번이 살인을 면하듯 창작 한 번이 매일의 충동을 막아내고 있다. 어쨌더나 뭘 만들려면 살아있어야 하니까. 그런데 내가 살려고 뭘 만들어내는 건지 뭘 만들어내려고 살고 싶은 건지 이제는 선후관계도 명확하지 않아서 잊어버린 것 같다.

 

창작이 사람을 잡아먹는 걸 많이 봤다. 툭하면 언급하곤 하는 <앨런 웨이크> 같은 게 좋은 예시겠다. 호러 소설 작가가 자기가 쓴 호러 소설에서 탈출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런 단순한 게임 속 이야기가 아니다.

글 좀 쓰다가 이상해진 사람들을 많이 봤다. 나는 이제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지나가는 사람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전우치에 대해서는 안다. 최동훈의 영화 <전우치>에서 강동원이 열연해줬기 때문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바로 옆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우치>에 대해 더 잘 안다.

타인의 작품에 대해서도 그런데 자기 작품이야 오죽할까. 나는 머릿속의 인물을 끄집어내기 위해 인물을 설정하고, 이 녀석은 뭘 입고 어떻게 생겼을까를 고민하며 일러스트를 그리며, 소설에 투입하여 살아있는 캐릭터로 만든다. 나에겐 회사 동료 직원보다도 이 캐릭터들이 더 생생하다.

 

내가 만들어낸 이 녀석들이 없는 세계를 쳐다본다. 아무도 말걸지 않는다. 그렇다고 조용한 것은 아니다. 나에게 뭔가를 자꾸만 요구한다. 내가 하는 일에는 전혀 실재감이 없고 아무런 의미도 느껴지지 않는다. 긍정적인 가치를 매길 수조차 없다.

이제는 창작과 분리 불안을 겪는 듯 하다. 작업중인 화면이 보이지 않으면 나는 울 것 같고 토할 것 같다. 뭔가를 쓰지 않으면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 같으며, 그만두게 된다면 나나 다른 사람이 뭔가를 하지 않아도 알아서 저절로 죽게 될 거라는 확신이 있다.

 

하지만, 소설의 주인공은 결국 가짜 세상을 내버려두고 진실된 세계로 나아가지 않던가? 굳이 <매트릭스>나 <다크 시티>, <트루먼 쇼> 같은 진부한 예시를 들지 않아도 말이다. 심지어 <외톨이 더 록!>에서도 히토리 고토는 자아의 알을 깨고 사람들을 만나 결속 밴드를 만들지 않느냐고.

아직까지도 알을 깨기가 무섭다. 나는 <외톨이 더 록!> 첫 화를 보다가 관뒀다. 그때 <수성의 마녀>라던가 다른 '매운' 작품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차라리 <외톨이 더 록!>을 보는 게 더 힘들었다. 이 캐릭터는 성장해서, 나를 내버려두고, 작품 속 다른 캐릭터들과 함께 스스로의 인생을 살아나갈 거라는 사실이.

내가 온실 속의 화초인지까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서울 잘 사는 동네 출신이 아니라는 건 내 쓸데없는 자부심 중 하나다. 하지만 작은 텃밭의 테라리움에서, 테라리움을 둘러싼 유리알을 깨고 어떻게 아브락사스를 향해 날아가야 할 지 모르겠다.

까놓고 말해 예술, 특히 창작을 누가 시켜서 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어릴 때 피아노 학원 보내고 기본적인 독서 교육 정도야 시키는 게 사회 풍조라지만, 그렇다고 학생들이 세계적인 작곡가가 되거나 작가가 되는 것까지 바라는 부모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부모가 그걸 강제하는 순간, 비극이 시작된다.

그렇다면 대다수의 창작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단순하고도 복잡하다. 단순한 이유는 '그런 걸 많이 접할 수 있는 환경에서 태어났기' 때문이고, 복잡한 이유는 '그런 환경'은 비밀리에 전수되기 때문이다. 필자만 해도 귀로 들으며 이야기를 컸다. 어릴 때 가족들이 <셜록 홈즈>나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이나 전래 동화 같은 걸 입으로 들려줬던 것이 지금까지도 뿌리로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한 방울이 모자라다. 일전에 지인과 이야기한 적이 있다. '작가로서 스타트에 100권 내지 1000권 정도의 경험이 필요하다면, 대성하는 데에는 10,000권의 경험이 필요한 것 같다.' 그러나 '그런 경험'을 하도록 몰아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작가 본인이다. 하지만 대관절 어떤 원동력이 작가를 10,000권 가량의 경험을 겪도록 몰아간단 말인가?

 

물론 기구한 생을 살다 가는 작가도 많다. 특히 일제강점기 조선을 살다 간 시인들. 그들에게는 '평범한 삶'이 허락되지 않았으니, 그들의 일생은 정치적으로 첨예하거나, 비극이거나였다. 이상이 일찍 요절한 거야 유명하고, 정지용은 납북 과정 중 폭격에 희생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가족을 만나러 간 사이 휴전선이 그어지는 바람에 백석의 시는 한동안 금서로 치부되었다.

어떤 작가는 스스로 환난을 찾아간다. 허먼 멜빌은 <모비 딕>을 쓰기 위해 배에 올랐다. 조지 오웰과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스페인 내전에 참가했고 그 경험이 소설에 반영되어 있다. 스콧 피츠제럴드는 젤다 피츠제럴드가 재발굴된 지금 스스로의 부정함과 불안증으로 아내와 자신을 파멸로 몰고간 작가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대관절, 무엇이 작가를 그 지경으로 몰아간단 말인가. 고작해야 글줄 몇 줄 쓰기 위해서 새로운 자극을 찾고, 통제력을 잃고 미쳐가는 도중에도 뭔가를 쓰기 위해 펜을 잡고, 결국 사람 신세 망치게 만드는 창작이라는 게 뭐길래 계속 창작을 하게 만드는가.

 

가끔 듣는 말이 있다. '노력 없이 존잘님 연성을 할 수 있는 손을 얻고 싶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니지만, 아니. 사실 이해 못한다. 나는 창작이라는 행위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실력이 모자란다면 그대로도 좋다. 그만큼 못하는 것도 과정의 일부로서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이 좋다. 그렇게 한 번 못하고 나면 다음엔 더 잘 될 거라는 막연한 믿음까지도 좋다.

혹자는 '네가 그래도 실력에 비해 눈이 낮아서 만족하는 거'라고 한 적도 있다. 부정하진 않겠으나 그 말은 반쪽짜리다. 나는 내가 지금 쓰는 글을 완성하면 다음 작품은 더 잘 쓸 거라는 사실을 알고 철석같이 믿는다. 다음 작품을 완성하고 나면 그 다음 작품은 더 좋을 것이다.

다른 사람은 말한다. 그렇게까지 창작을 좋아할 수 있다면 그건 재능이라고. 그런 점에서는 타고 난 재능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결국 무엇이 나를 그 지경으로 몰아가고 있는가. 더 이상 이걸 그만둘 수 없다고 속삭이는 머릿속의 귀신은 무엇인가.

 

펑크 록의 대모로 유명한 패티 스미스 또한 <몰입>에서 그 정답을 밝혀내 보려 한 적이 있다. “왜 글을 쓰는가? 합창이 터져 나온다. 그저 살기만 할 수 없어서.”

대다수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창작을 하고 싶어 하진 않는다. 창작물에 많은 걸 바라지도 않는다. 만화 <체인소맨>을 보고 울었던 적이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려 했을 뿐인데 오히려 그로 인해 타인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작가인 후지모토 타츠키가 영화광에 서양화 전공이라는 사실을 듣자, 나는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게임 <앨런 웨이크 2>는 조금 궤가 달랐다. 자신을 휘감는 공포의 수렁에서 빠져나오고 싶어서 창작을 하는 사람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런 걸 즐기고 감동을 받았다고 하면, 사람들은 나에게 특이하다는 반응을 보이곤 한다. '어 그래? <체인소맨>은 나한텐 어렵던데. 나는 딱 <귀멸의 칼날> 수준인 듯.' 내지는 '<앨런 웨이크 2> 하고 있다고? 진짜 너 다운 게임 하네.' 같은 말을 들었다.

 

사실 정답은 없는 문제다. 작가는 개별적이기에 가치를 지닌다. 우리는 후지모토 타츠키라는 '유일성'에 찬사를 보내고, <컨트롤>이나 <클레르 옵스퀴르> 같은 게임의 독특한 개성에 감탄하며, 한강이라는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감성'에 대해 정치적 위치나 작품성 등을 고려하여 '상'을 매긴다.

그들은 이미 개별적인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미 평범한 사람들과 일상적인 대화조차 힘들 때가 많다. 돈과 명예 같은 건 이미 관심이 없다. 사회적인 금기조차도 가끔은 무시의 대상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영혼일 따름이다.

 

이렇게 말하면 그들의 영혼은 충만해 보인다. 실제로 영혼이 충만한 사람도 여럿 있다. 하지만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들은, 적어도 스스로는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좋아하는 게 없어'라는 착각 같은 걸 스스로 품고 산다. 겉보기에는 누구보다도 창작을 좋아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취향이 누구보다도 뚜렷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기만이 이런 기만도 따로 없어 보인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자. 그들의 창작물이 사회적 인정을 받기란 쉽지 않다. 그들의 구성성분은 이미 평범한 타인들과 다르다. 우월 같은 걸 논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다르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이해하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그들은 쉽게 창작을 그만둔다. 물론 개중에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도 분명 존재한다. 발을 깊게 담그지 않은 사람들.

하지만 이미 발을 깊게 담갔다면, 헤엄치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이 물 속에서 빠져나오기란 불가능한 법이다.

 

그럼에도 사람은 물 속에서 숨을 쉴 수는 없다. 뭍으로 나가려 사람은 헤엄치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창작물이 파도처럼 밀려나온다. 우리가 '명작'이라고 받아들이는 무언가는 대체로 깊이 가라앉은 사람의 발버둥이다.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가 사소할 수는 있다. 초심을 되새기는 것이 중요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깊이 가라앉은 상태에서 헤엄을 위해 뻗은 손, 그 내뻗음이야말로 창작의 근원이다. 심연에서 나가기 위해 우리는 읽고, 생각하고. 그리고 쓴다.

<길복순> 이야기를 하려는데 <존 윅>부터 이야기해서 미안하지만, <존 윅>은 참 멋있는 영화였다. 키아누 리브스의 절제된 건푸(Gun-Fu)와 과장된 확인사살 동작, 롱테이크를 위주로 한 다양한 촬영방식도 있겠으나, 그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건 역시 <존 윅>이 보여주는 하나의 세계관이리라.

나름 어반 판타지 세계관을 연출하는 작가로서 <존 윅>의 세계관은 매력덩어리다. 뉴욕에 남들은 모르는 킬러 사회가 있다. 그들은 의뢰를 받으며 '콘티넨탈'이라 불리는 호텔을 오가며 작전에 필요한 무기와 자료를 입수한다. 조직 범죄와 킬러 사회이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자멸하지 않도록 '규칙'에 스스로를 옭아맨다.

그러나 그 세계관은 절대로 직접적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적어도 <존 윅> 본편에서는 그렇다. 대신 이런 사항들을 '영화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왜 존윅이 그렇게 많은 총알과 구타에도 죽지 않는가? 단 한 줄 최소한의 설명만이 있다. '방탄 수트라서요.' <존 윅>은 말을 많이 하지 않기 때문에 품위 있는 영화고, 때로 던지는 농담은 재치가 있다.

 

그런데 그럼 <길복순>은? <길복순> 또한 <존 윅>과 같이 비정한 킬러 사회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취하는 방향성은 정반대다.

오프닝 시퀀스를 보자. 주인공 길복순은 야쿠자 대장을 납치해 와 길에서 깨운다. 원래는 자는 중 죽일 예정이었지만, 약간 마음이 바뀌었다는 말과 함께 카타나를 던져주고, 자신은 도끼를 들어 결투를 벌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길복순은 수를 읽다가 패배를 예감한다. 장비의 격차 때문이다. 이마트에서 3만원 주고 산 도끼로 명검을 이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잠깐! 장비를 바꾸는 척 하면서 야쿠자를 총으로 쏴 죽인다.

<인디아나 존스 2> 였던가. 검법을 보여주는 악당을 인디아나 존스가 총으로 쏴 죽인 장면이있어 하나의 상징처럼 쓰였던 적이 있다. 여기서는 문명과 야만을 구분짓는 경계처럼 연출되었지만, <길복순>에서는 다르다. 암살 대상이었던 야쿠자는 오히려 명예를 중시하는 사무라이로 보이고, 길복순은 능력주의 기업 사회의 비열한 킬러로 비춰질 뿐이다.

만약 <존 윅>이었다면, 두 사람 모두 서로의 명예를 걸고 한 판 승부를 벌였을 것이다. 누구도 비열하지 않았고, 정직하게 액션으로 승부를 한 다음 누군가 과장된 확인사살 동작으로 결투를 닫았을 것이다. 길복순은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그냥 회사원이니까.

그리고 영화 제목이 나오기 시작한다. <길복순>이라고.

 

<존 윅>은 최대한 세계관에 대해 입을 여는 걸 자제하려고 했다. 그들의 세계관은 관객들에게도 은폐된 채 은유로만 전달된다. 옛날 주화, 콘티넨탈 호텔, 성역, 최고 의회, 혈판장. 관객들은 온전히 설명받지 못하지만, 그렇기에 뒤에서 뭔가 대단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느끼며 영화의 내용을 판타지마냥 신비하게 받아들인다.

<길복순>은 <존 윅>과 유사점이 많은 킬러 세계관을 차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세계관을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다. 대신 이렇게 보여준다. '야, 세상 사는 건 다 똑같아.' <길복순>이 보여주는 기업 킬러 사회는 오히려 현실의 기업 사회를 키치하게 과장해서 웃음거리로 삼는다. 이걸 수전 손택은 '캠프'라고 불렀던가.

길복순은 MK라고 불리는, 기업 킬러 사회의 규칙을 만든 대기업에 다니고 있다. 심지어 A급 간판 킬러로, 그녀가 맡은 '작품' 보수는 자릿수를 세기도 벅차다. 한편 MK 밑에만 해도 수많은 '연습생'들이 매월 시험을 치르고 있다.

이런 킬러 사회의 구조는 어느 정도는 연예기획사를 닮아있다. 실제로 작중 길복순이 회사가 하는 일을 숨길 때 '이벤트 회사'라고 거짓말한다. 영화 감독이 각본도 같이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레퍼런스로 삼기에 연예기획사는 그의 입장에서는 적절한 업종임에 충분하다.

 

숨겼던 것을 드러내는 과정은 잔인하고 두렵기까지 하다. <존 윅>은 치부를 숨기고 오히려 신비로 포장했기 때문에, 스타들이 계단을 밟고 자신을 방해하는 킬러들에 맞서 올라가는 장면은 숭고하게 그려진다. <길복순>은 오히려 이 '스타'에 해당하는 킬러들을 둘러싼 기업 사회는 사실 비정한 시스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다들 대기업의 A급 간판 스타가 되고 싶어하지만, 실제로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인생은 더 나아질 게 없다. 길복순이나 차 대표와 같은 '실력자'들까지 규칙에 얽매여 있다. 오직 순수하게 '악당'으로 연출되는 차 이사만이 원하는 것을 가지기 위해 욕망대로 행하지만, 그녀 또한 결국 그 끝이 좋지는 않다. 김지영은 연습생으로, 길복순의 작품을 돕다가 커다란 음모에 휘말린다.

킬러 사회의 바깥에 있는 길복순의 딸인 길재영 또한 마찬가지다. 길재영은 스스로가 레즈비언임을 자각하지만, 그로 인해 협박받고 타인의 시선을 자각한다. 실제로 그녀가 작품 내에서 큰 잘못을 했느냐 하면, 원인 자체는 그녀에게 있지 않다.

잘못한 것이 없는 인물들이 '사회'라는 시스템 안에 갇혀서 고통받는다. 그 고통을 참지 못하고 분노를 터뜨리거나, '일'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한 결과 다시 서로를 상처입힌다. 모순은 누적되고, 시스템은 붕괴한다.

 

액션은 충분히 좋은 영화였다. 꼭 새로운 연출이 있었다고는 말 못하겠다. 연출에 있어서는 <킹스맨>의 교회 장면이 떠오르는 듯 했다. 특히 차 대표가 블라디보스토크 출장에서 '작품'을 만드는 장면에서는 말이다. 적어도 액션을 보겠다면 시간이 아깝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길복순>이 마냥 좋은 영화냐고 하면, 그런 건 아니다. 쌓여가는 모순과 붕괴하는 시스템에 대한 감각은 충분하나, 더 나은 비전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촌스러운 지점도 분명 있다. 길복순이 '미래의 수를 내다보는' 연출은 마지막 장면에서는 멋지게 쓰였으나, 정작 그 장면을 제외하고는 중요한 장면에서 멋있게 쓰이지 못했다. 오히려 사소한 장면에서만 활용되어 일관되지 못한 느낌을 준다.

또한 작품의 연출이나 미장센 또한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작품은 너무나도 만화적이다. 웹툰이나 일본 만화, 그래픽노블을 보는 느낌인데, 아마도 <존 윅>과 다른 길을 가기 위한 과장된 경박함 때문이리라. 오히려 마음에 드는 점이기는 했으나, 진지한 걸 원하는 사람에게는 와닿지 않을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점들 때문에 이 영화를 마냥 '별로다'라고 말할 수는 없겠다. <길복순>이 완벽한 영화라고까지는 않겠으나,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지점이 많은 영화이며 한번쯤 권할 만은 하다.

지금 퇴사하겠다고 말하면 다음 달 중으로 퇴사 가능하냐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진지하게 말하기는 무서웠으므로. 하지만 퇴사를 이미 마음속으로는 결정했는데 더 이상 숨길 수는 없었다.

결국 내일 근무 전에 면담이 잡혔다. 퇴사가 정말로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어떤 사람은 '콜센터잖아. 어차피 대체 인력이 쌔고 쌘 시장인데, 거기다 금방 떨어져나가는 사람 많은 노동 환경인데 퇴사 될걸?'하고 격려해 주었다. 그게 격려라는 건 참 매정하고 웃기다. 그럼에도 나는 두렵다. 내가 퇴사하고 싶다는 사실을 회사에서 받아주지 않을까봐.

 

퇴사를 하는 것에는 죄책감이 있다. 누군가를 실망시킨다는 죄악감. 동거 중인 어머니. 내가 일을 하지 않던 기간 중 버티라고 푼돈이라도 쥐여주셨던 어머니에게는 이제 내가 용돈을 드리고 싶었는데 금방 그만두게 되었다.

내 젠더조차도 모르게 된 나로서는 친형이라고 불러야 할 지 친오빠라고 불러야 할 지. 아무튼 그 사람은 내가 취직하자마자 격려하면서 옷을 사주고 신발을 사주고 가방을 사주고 심지어 위스키 씩이나 사줬다. 지금도 반 정도나 남아있다. 힘든 날 마시라고 했는데. 어쩌면 힘든데도 마시지 않고 개겨서 이렇게 힘들었던 건가. 하지만 알콜중독이 되긴 싫었는 걸.

사실 회사에조차 미안할 지경이다. 한 달 교육하고 뽑았던 애새끼가 고작 한두 달 일하고 나간다는 게 내가 생각해도 웃기고 그렇다. 돈 벌려고 온 거 아니야? 그럼 돈 벌고 나가야지. 돈 벌려고 오셨잖아요. 뭐가 문제야. 그러게요. 하지만 '안 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바틀비가 말했다.

 

허먼 멜빌이 <필경사 바틀비>를 쓴 건 <모비 딕>을 쓴 직후다. <모비 딕>을 생생하게 쓰겠다는 일념으로 포경선에 탔던 남자가 어째서 <모비 딕> 직후에 <필경사 바틀비> 같은 걸 써버린 거냐고. <필경사 바틀비>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 못하겠다고 했던 누군가가 생각난다. '안 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러면 바틀비는 거기 왜 있는 거야? 일도 안 할 거면서.

모르겠다. 문학은 퍼즐로 만든 러브 레터에 가깝다. 조각을 맞추어 편지를 완성해도 그 편지의 글귀까지 이해할 수 있다는 법이란 없다. 하지만 나는 콜센터 일을 하는 동안 내내 생각했다. 안 하는 편이 낫겠다. 안 하는 편이 낫겠다. 안 하는 편이 낫겠다. 차라리 끔찍한 꿈을 꾸고 일어나 벌레가 된 자신을 발견하는 편이 낫겠다. 그러면 출근하지 않아도 될테니.

일이 힘들기는 했지만 단순히 일만이 힘든 건 아니다. 카드사 콜센터란 협잡꾼이고 사기꾼이다. 이미 젊은 축의 사람들은 ARS나 앱을 통한 상담에 익숙해져 있기에 실제로 전화 통화를 기다려 들어오는 고객은 50년생이나 60년생이다. 그런 사람들을 상대로, 그 사람들이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어휘를 써서 대화를 한다. 그 사람들을 상대로 금융 상품을 판다. 돈은 시간이 매개된다면 더 큰 돈을 받고 팔 수 있다.

 

수많은 호러 소설의 주인공들이 생각난다. 호러 소설들, 특히 코즈믹 호러의 주인공이 마지막에 목도하는 것은 죽음을 안겨주는 살인마라기보다는 거대한 존재와 그로 인해 다른 비인간적 존재로 변해 가는 자기 자신이다.

친구가 말했다. 너 회사 들어간 다음에 생산적으로 변했다고. 회사 들어간 다음부터 하는 말들이 전부 비평적으로 하나하나 타율이 높다고. 소설도 감성이 풍부해졌다고. 다 맞는 말이고 좋은 일이다. 하지만 더는 알고 싶지 않다. 나는 이제 모르고 싶다. 그냥 침대에 이불 덮고 베개에 얼굴 처박은 다음 귀도 틀어막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외치고 싶다.

여기서 더 일해봤자 더 형편이 나아지지 않을 것임을 안다. 탈출구나 올라갈 계단 같은 건 없다. 고작해야 콜센터 일으로 쌓을 수 있는 내공 같은 건 없다. 돈 벌어서 저축한 다음 언젠가는 그만둬야 할 일이었을 뿐.

내가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이젠 신이라도 믿고 싶은 지경이다. 예수는 어부 말고도 매춘부, 그리고 세리들과 어울렸지만 그것은 그들이 경건한 믿음을 가지고 죄를 끊어내었기 때문이다. 신이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속았다는 느낌부터 받았습니다. 저는 이 책을 에세이집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Horses>라는 음반으로 유명한 패티 스미스는 에세이집을 여럿 냈는데, 개인적으로 <달에서의 하룻밤>을 읽고 그 문장에 꽤 감명을 받았기 때문에 계기가 되어서 패티 스미스 외에도 다른 예술가들의 에세이를 여럿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몰입>은 구조가 특이합니다. 가운데 쓰인 단편 <헌신>을 중심으로 서문에 해당하는 <마음이 작용하는 방식>이, 뒤에는 작가 후기 격인 <꿈은 꿈이 아니다>가 실려 있습니다. 실제로는 에세이에 햄버거처럼 단편을 끼워파는 형식인데, 상술도 나쁘고 악독해야 상술이지 이렇게 좋아서야 상술이라고 욕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에세이에까지 감상문을 쓰진 않습니다. 왜냐면 저에게 에세이는 정말 가볍게 쉬려고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단편 '한 작품'에 리뷰를 남기는 것도 어려워합니다. 한 작품에서 많은 걸 읽어내 길게 분석할 능력도 저는 그렇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패티 스미스의 <몰입>, 정확하게는 단편 <헌신>에는 읽은 직후인 지금 적어두지 않으면 못 털고 지나가서 내일 하루를 망치게 될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래서 짧게나마 감상을 적으려고 합니다.

<헌신>의 스포일러가 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헌신>은 <키다리 아저씨>의 반대 느낌입니다. 이모 밑에서 자란 유지니아는 스케이트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고, 마리아의 교육에 따라 챔피언에 도전할 준비를 하는 등 채비를 마치지만, 결국 알렉산더라는 남자와 눈이 맞아 달아납니다.

하지만 알렉산더가 유지니아를 데려간 곳은 필라델피아였고, 온화한 기후의 필라델피아에서 스케이트를 탈 수 없었던 유지니아는 알렉산더를 죽이고 집으로 돌아와 얼어붙은 연못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합니다. 살얼음이 녹기 시작하는, 곧 금이 가 깨지기 직전의 연못 위에서 말입니다.

 

줄거리만 말해서는 이해 못할 글입니다. 이야기는 너무나도 단순합니다. 작품 자체가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보기에도 이야기의 단순성 때문에 오히려 과한 해석이 들어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지경입니다.

패티 스미스는 <헌신>을 쓰면서 어떻게 작가가 창작이라는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행위에 몰두할 수 있는지, 왜 혼자 고독 속에서 기쁨을 느끼려 하는지에 대해 생각했다고 합니다. '어째서 글을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걸까?'

솔직히 말해, 그 점을 파헤치는 것은 작가의 몫이지만 그 점을 독자에게 납득시키는 것은 여느 작가라 하더라도 어려운 지점입니다. <헌신>에서 패티 스미스는 그 점을 설명하는 데에는 다소 난항을 겪습니다. 물론 <헌신> 자체가 나쁜 작품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유지니아가 가진 스케이트에 대한 헌신이나 경건함은 실제로 창작에 몸을 담근 사람이 아니라면 납득하기 어려운 구석이 많습니다.

 

하지만 <헌신>이 아니라 <몰입>은 다릅니다. <몰입>은 창작자가 창작을 하는 이유를 파헤쳐 시적인 에세이로 쓴 것에 가깝습니다. <헌신>의 창작은 그 과정에서 필수불가결한 실험 과정이었을뿐입니다. 그러면 패티 스미스가 발견한 결론은 뭘까요? 왜 글을 쓰지 않고 못 배기는 것일까요?

패티 스미스는 서문과 마지막 문장을 같은 문장으로 끝냅니다. 꽤 멋있는 수미상관입니다. 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 합창이 터져 나온다. 그저 살기만 할 수가 없어서.”

넷플릭스 <킬복순>을 보려다가 오프닝 시퀀스가 끝나고 창을 닫아버렸다. 더 이상 보지 못하겠어서. 만족이 안 되어서는 아니다. 이야기는 시작도 안 했지 않은가. 일을 하다가 슬쩍슬쩍 보려고 틀어놓은 거였는데,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하고 싶어서 끈 건 맞다. 그러나 그 일이 없었어도 그냥 10분 정도 보고 껐을 거다.

진짜 이유는 이미 알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단순히 영화 푯값이 올라서 그런 건 아니다. 극장에 가지 않더라도, 넷플릭스라던가 다른 OTT에도 볼 게 많은 시대가 아닌가. 하지만 그런 것조차 나는 보지 못한다. 지금 내 넷플릭스 구독료는 오로지 어머니를 위한 것이다.

기대되는 영화만 개봉하면 영화관에 가던 시절도 있었다. 마블 영화들이 한차례 히트한 직후 쯤이었다. 하지만 나는 영화관에 한 시간 정도 일찍 도착해서는,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하고 그냥 돌아오기 일쑤였다. 심한 경우에는 상영 직전에 관람을 포기하는 바람에 예매 취소도 못 하거나, 보다가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한때는 시네필이 되어보려고 한 적이 있었다. 혼자서 다사다난한 대학생활을 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소설가를 그만두었고, 예술에 준하는 다른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시절 어리석게도 나는 비평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튠즈 미국 계정을 만들어 국내에서 보기 힘든 영화들을 정식 루트로 구매했다. 기억에 남는 영화가 많이는 없지만, 이름도 긴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의 <버드맨>, 짐 자무쉬의 <데드 맨> 같은 영화들이 하필이면 기억에 남는다.

그때의 나는 당연히 감독의 커리어 전체를 파고 들어야 하는 줄 알았다. 코언 형제를 참 좋아했다. <블러드 심플>이나 <파고> 같은 걸 보면 내용은 전혀 웃기지도 않은데 나는 웃겼다. 그런가 하면 폴 토마스 앤더슨이 <리노의 도박사>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는 걸 난 알고 있다. 그것도 꽤 괜찮은 첫 작품이었다. <스타워즈 : 라스트 제다이>로 <스타워즈>라는 '신화'를 '살해'한 라이언 존슨은 <브릭>이라는 하이틴 느와르로 커리어를 시작했고 말이다.

그런가 하면 아이튠즈 스토어에는 온갖 나라의 작품이 있어서 덴마크 드라마인 <더 브릿지>도 봤고, 뭐 하여튼 시도한 건 많았다.

 

물론 저걸 전부 영화관에서 봤다는 이야긴 아니다. 말했잖은가, 아이튠즈 스토어라고. 이미 진작에 극장에서 내려가 아카이브로 판매되던 작품들 아닌가. 카페에 아이패드를 올려놓고 이어폰을 꽂아 봤고, 집에서 대형 모니터로 봤으며, 가끔은 버스 안에서 핸드폰으로 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한다. 그땐 스마트 기기가 참 편했는데. 요새는 아이폰 조금만 만져도 아이폰 온도보다 내 머리가 뜨끈뜨끈하고 내 목이 뻣뻣하다. 컴퓨터로 넷플릭스를 틀어놓고 가만히 보고 있자니, 내 인내심이 미칠 지경이다.

나는 좀처럼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미를 지녔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19층에 존재하고, 지하철역은 지하 1층이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것조차 답답해서 나는 20층을 걸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쉬고 싶어도 가만히 집에 앉아있질 못한다. 꼭 밖을 한바퀴 돌다가 저렴한 싸구려 아메리카노라도 하나 주문하고 카페에 머물다 가야 직성이 풀린다. 담배를 안 해서 다행이다. 술은 최대한 가끔 한다.

 

나는 이게 모두 내 불안과 강박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책을 읽는다 치자. 나는 페이지를 넘기면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그건 만화책도 마찬가지다. 최근엔 게임조차도 포기할 지경이지만, 게임 또한 플레이를 하는 동안 나는 게임 속의 캐릭터나마 움직이고 있다는 기분을 받는다.

그러나 영화, 드라마, 아니면 애니메이션을 볼 때의 나는 다르다. 나는 함부로 2배속을 누르거나, 장면을 넘길 수 없다. 갑자기 나오는 야한 장면에는 내성이 없어서 생략하고는 하지만, 영화를 볼 때에는 최대한 재생 툴바를 보지 않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영화의 러닝타임은 나에게는 신성하다. 놓치는 게 있다면, 영화 자체를 처음부터 다시 보는 것이 옳다. 보면서 딴짓을 하더라도 러닝타임은 유지되어야 한다.

물론 이건 말도 안 되는 강박이다. 소설만 해도 이해 못한 부분이 있다면 뒤로 페이지를 넘겨서 다시 읽지 않는가. 화장실은 어떻게 갔다오라는 말인가. 머리로는 안다. 그리고 화장실 정도야 영화를 멈춰놓고 갔다 온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영화의 러닝타임에게 저지를 수 있는 몇 안되는 실례다.

 

에릭 사티는 '가구 음악'이라는 개념에 대해 말하고는 했다. '공증 사무소, 은행 등을 위한 가구 음악' '가구 음악은 가구를 보완한다' '가구 음악은 사람을 피곤하게 하지 않는다' '거리낌 없이 들으십시오. 제작 밎 맞춤'이라며 열심히 가구 음악을 피력했다.

영상조차도 이제는 가구가 되어가지만 나는 가구로서 영상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음반의 트랙리스트와 러닝타임에게도 비슷한 존중을 하는 사람이다.

 

영화관, 사실 나는 영화관이라는 게 무섭다. 광고가 끝나고 불이 꺼지는 순간, 질 좋은 음향기기에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무거운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 순간이 무서워서 영화관에서 도망치고는 했다.

시인 기형도는 영화관에서 죽었다. 그의 사인은 의문사였다. 후지모토 타츠키는 <파이어펀치>에서 말한다. '사람은 죽는 순간, 영화관에 서 있는 거야.' 가만히 앉아서 재미있는 영화를 영원히, 계속 본다고 한다.

나는 영화관에 가는 게 지금도 무섭다. 영화가 재생되기 시작하면 내 입은 꿰메어진다. 그러나 영화는 계속해서 나에게 말을 걸어댄다. 이 미장센은 어때. 이 카메라는 어때. 여기에 이 소리를 더해봤는데 어때. 나는 입이 없다. 그러나 비명을 질러야 한다. 영화관을 박차고 도망쳐나온다.

절판된 책들을 둘러보다 보면 '이거 현지에선 좀 잘 나가는 어반 판타지 소설인데?' 싶은 책들이 많습니다. <마법살인>이라는 쌈마이한 제목으로 출간되었던 <드레스덴 파일즈> 시리즈가 있구요, <런던의 강들> 시리즈도 2권까지 출간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뱀파이어 헌터물인 <애니타 블레이크> 시리즈도 3권까지나 출간된 적이 있구요.

퍼트리샤 브릭스의 <문 콜드>도 그런 '현지에서 잘 나가는 어반 판타지 소설'입니다. <머시 톰슨> 시리즈의 첫 권으로, 현지에서 이 시리즈는 벌써 15권을 앞두고 있네요. 지금도 '어반 판타지 대표작' 하고 영미권에 검색하면 앞서 말한 <드레스덴 파일즈>와 <런던의 강들>과 같이 자주 얼굴을 비추는 시리즈입니다.

솔직히 말해 직전에 읽었던 <마법살인>, 그러니까 <드레스덴 파일즈>가 페이지터너로서의 놀라운 흡입력과 동시에 상당한 구림을 보여준 탓에 <문 콜드>도 그렇게 기대는 안 하고 읽었습니다. 상당히 오래된 작품이고, 국내에서 3권까지만 나오고 절판된 데는 다 이유가 있을테니까요.

 

다행히, <문 콜드>에서는 수확이 좀 있는 편이었습니다. <마법살인>도 재미는 있었지만, 그게 단순 '페이지 터너'로서 자극적인 소금맛이라기보다는 <문 콜드>는 그래도 생각의 여지를 주는 작품이었다는 느낌일까요.

<문 콜드>는 '머시 톰슨'이라는 자동차 정비업을 하는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평범한 여성은 아니고 '워커'라는 일종의 '코요테로 변신하는 능력'을 지닌 셰이프시프터고 (작품 내 여러 차례 강조되지만, '늑대인간'은 아닙니다.) 인근에는 늑대인간 우두머리 '아담'과 그의 무리들이 살고 있으며 다른 초자연적인 존재(요정, 마녀, 그리고 흡혈귀)들이 그녀에게 자동차 정비를 요청하곤 합니다.

이 머시 톰슨의 이웃인 '아담'이 습격당하며 그의 의붓딸인 '제시'가 납치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로 인해 머시 톰슨은 그녀를 길러준 부모 격인 또다른 늑대인간 우두머리 '브랜'을 찾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늑대인간 무리를 둘러싼 음모에 휘말리게 되죠.

 

작품을 읽는 내내 이 '초자연적 존재'들은 '소수자성'과 동치됩니다. 이를테면 '과학의 발전으로 스스로를 숨길 수 없게 된 요정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인간들에게 드러냈고, 그 대가를 치렀다'는 서술이 등장합니다. 그 외에도 늑대인간이면서 동성애자인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주인공인 '머시 톰슨' 자체도 매우 과시적인 남성성을 드러내는 늑대인간 무리에 섞이지 못하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게다가, 애초에 '늑대인간'이 아닌 '워커'니까요.)

그런 소수자성은 일반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기 힘들고, 따라서 이를 두고 '소수자 사회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정치극을 다루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후반에 진상이 밝혀질 때의 이야기이고, 중반부는 종족간 로맨스입니다. 퍼트리샤 브릭스가 구상한 '늑대인간'들의 생태는 매우 흥미로운데다가, 여기에 여성 화자로서 '머시 톰슨'이 어떻게 대응하며 스스로를 지키고 있는지 생각하면 굉장히 젠더적으로 진보적인 소설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이 점은 아쉽습니다. 어디까지나 '소수자 내부'에 관한 소설이라는 것. '일반인'들이 늑대인간이나, 요정, 혹은 뱀파이어같은 초자연적 존재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예 공란으로 비워져 있는 느낌입니다. 꽤 뼈아픈 것이, 작품 자체가 '소수자로서의' 늑대인간이 어떻게 인간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인가를 다루려 노력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더 아쉽습니다.

그렇다고 그 <마법살인>조차 2권을 구해뒀는데 이 작품을 계속 읽지 말라는 법은 없지요. 조만간 2권을 구해야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최근에 알라딘 북펀딩을 통해 영화 <헬레이저>의 원작인 <헬바운드 하트>가 출간되었죠. 제가 리뷰할 책은 그 작가 클라이브 바커가 쓴 한참 전에 출간된 단편집 <피의 책>입니다. 대충 2008년 전후쯤으로 여러 판본으로 출간이 되었던 책입니다.

왜 <헬바운드 하트>가 아니라 <피의 책>이냐구요. <헬바운드 하트>는 이제 막 나왔으니 구하고 싶을 때 구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펀딩을 보고, '아, 만약 이번에 저게 잘 팔리면 <피의 책>도 값이 오르겠구나' 싶어져서 값이 오르기 전에 미리 구매해뒀습니다. 아직 가격이 저렴하게 나와있다면 여러분들도 미리미리 구해두시기 바랍니다.

 

사실은 말입니다, <피의 책>은 전에 읽었던 적도 있고 해서 사두기만 하고 읽을 마음이 들 때까지 묵혀둘 예정이었습니다. 네, 원래 책은 사서 읽는 거 아니잖아요. 사둔 거 중에 읽는 거지. 스팀 라이브러리 같은 게, 아니 원래 그 원조 격에 해당하는 게 '내 서재' 아니겠어요.

묵혀둘 예정이었는데 갑자기 펼치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별 게 없습니다. 저는 원래 호러를 못 읽습니다. 못 읽는다는 건 무서워서 못 읽는다는 게 아니라, 재미를 못 느낀다는 사실입니다. 호러를 읽어도 거기서 의도하는 공포나 저 나름의 흥미를 읽어내지 못했었습니다.

작년만 해도 거의 무협에 가까운 작품을 쓰고 있었는데, 그때 주변에서 호러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저에게 '호러'라는 것을 이해시켜보려고 하셨던 게 생각이 납니다. 그때는 '그거 그냥 칼로 무찌르거나 (파훼법 같은 걸) 깨달으면 되는 거 아니냐'하고 전혀 받아들이지 못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데 갑자기 호러가 읽힙니다. 놀랍게도요. 최근에 취직해서 일을 시작한 탓일까요? 정식 근무 일주일차만에 '호러'라는 장르의 핵심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는 느낌이랄까요.

제 친구는 괴담이나 도시전설 같은 것이 '악의'에서 출발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좀 정확하게는 그것이 '출발점'이 악의라기보다는 '경유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출발점은 어디일까요. 그건 이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시스템입니다.

전화 통화를 한다고 합시다. 전화 통화 도중에는 '표정' '시선'이나 '몸짓' 등의 발화들은 모두 편집되어 잘려나갑니다. 통화상으로 듣는 음성 또한 실제로 만나서 듣는 음성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 편집되어 잘려나가 비어있는 공간에서, '이해 불가능성'이 발생합니다. 이 '이해 불가능한' 지점에서 '악의' 혹은 '생명의 위협' 등 공포를 느끼는 순간, 그 순간이 '호러'라는 장르가 발생하는 지점입니다.

네, 노동을 하면 이걸 몸으로 체감하게 되더라구요. 그래서 호러를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이쯤 딴소리를 했으면 '그래서 <피의 책>은 그럼 어땠는데?'하고 궁금해지실만도 합니다. <피의 책>은 상당히 거칠고 터프한 호러 단편집이었습니다. 환상성이 강하지만, 그 환상성은 세밀한 묘사를 통해 표현된 단단한 현실 위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다양한 단편이 가지각색의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은 지하철 도살자와 무기력한 주인공이 소위 '맞다이'를 까는 소설이라고 읽을 수 있겠습니다. <야터링과 잭>은 악마와 태평한 사나이의 한판 승부를 다룬 코미디 호러입니다. <섹스, 죽음 그리고 별빛>은 꼭 로버트 W. 체임버스의 <노란색 왕>을 떠올리게 하는 측면도 있는, 쇼에 관한 단편이구요.

이 소설들은 상당히 날것의, 폭력적이고 성적인 묘사를 가감없이 담고 있습니다. '차라리 영상으로 보는게 덜 잔인하겠다'는 느낌이랄까요. 선혈이 실시간으로 마구 낭자하는 영상보다는 꼭 마치 핏물이 튀어, 그것이 방울방울 말라가는 과정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이 단편집으로 미국에 발표된 것은 1984년으로, 슬래셔나 그런 영화들이 상당히 유행하던 시기입니다. 스래시 메탈 같은 것도 많이 연주되었구요. 지금 읽기에는 상당히 폭력적이라 분명히 취향을 탈 수 있는 책입니다. 불편한 부분도 많을 거구요.

그러나 무미건조함 속에서 사람이 점점 광기에 휩싸이고, 공포에 잡아먹혀 죽거나 혹은 '공포 그 자체'가 되어 다시 타인을 공포로 몰아넣는 상황이 되는 그 감각은 굉장히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읽기 전에 마음 준비 단단히 하고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드레스덴 파일즈> 시리즈가 한국어로 발간된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드레스덴 파일즈> 시리즈가 한국어로 발간된 적이 있단 말입니다. <드레스덴 파일즈> 시리즈가요.

라고 해도, 대다수는 정말 '그게 뭔데 오타쿠야'라고 하실 겁니다. 영미권에서는 정말 유명한 '하드보일드 마법사 탐정' 시리즈입니다만, 국내에서는 생소하기 그지없습니다. 미국 드라마판이라도 좀 인기를 얻었다면 말이 달랐을텐데, Sci-Fi 채널에서 시즌 1을 제작하기는 했습니다만 성적 부진으로 시즌 2는 제작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드레스덴 파일즈> 시리즈는 2020년에 17번째 시리즈가 나오고 18권째를 바라보고 있는 장기 연재 시리즈입니다. 한 권에 하나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영미 특유의 펄프 픽션 감성을 좋아해서, 저도 연재 방식만큼은 꼭 이런 스타일로 천천히 '권수 단위'로 책을 내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는 합니다.

 

그래서, 이 <드레스덴 파일즈> 시리즈가 한국에 출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2권까지나요. 2007년 두드림이라는 출판사에서 발매되었습니다. 첫 권의 제목은 <마법살인> (원제 <Storm Front>), 그리고 그 다음 편은 <늑대인간>(원제 <Fool Moon>)입니다. 왜 두 권 나오고 절판되었는지 아실 만한 번역입니다.

하지만 <마법살인>의 내용물을 보신다면 더 놀라우실 겁니다. 소설이 굉장히 유치하고, 낡았고, 너무 마초적이기 때문입니다. 작중에 나오는 마법은 동화에 가깝고, 배경이 되는 시카고의 갱단은 피상적인 느낌을 줍니다.

혹시 느와르 작가 중 '미키 스필레인'이라는 작가를 아십니까? 미키 스필레인의 <마이크 해머 시리즈>에 동심을 더한 느낌입니다. 등장하는 모든 여성 캐릭터는 나약한 게 주인공 해리 드레스덴에 홀려 있는 느낌인데다, 마법은 유치하며, 악당도 진부합니다. 당시 기준으로는 새로웠겠다 싶은데, 지금 기준으로는 이미 읽을 만한 책이 차고 넘칩니다.

 

사실 저는 읽다가 너무 마초적인 느낌이 강해 반발심이 들어서 읽기를 그만두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끝까지 읽어보았습니다. 뇌를 빼고 읽어지니까 정말로 독서가 되더라구요.

마초적인 부분은 굉장히 반발감이 들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이 굉장한 페이지 터너(Page Turner)라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주인공 해리 드레스덴이 늘어놓는 독백들은 유치하고 후지지만, 그럼에도 페이지를 계속 넘기게 되는 이유는 작품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들이 그를 좀처럼 놓아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느와르와 판타지의 결합 답게, 작품은 시작부터 굉장히 빠르게 핵심적인 사건을 보여주며 치고 들어옵니다. 일찍부터 붙은 불에 작가는 매 장이 끝날 때마다 장작을 넣고, 그 불이 식기가 무섭게 장작을 넣고 ⋯ ⋯ . 마침내 캠프파이어로 화르르 불이 타오를 때까지 자꾸 장작을 집어넣습니다. 게다가 이 캠프파이어가 생각보다 구조가 탄탄합니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꽤 장관입니다.

지금은 구하기 어려운 책이기도 하고, '어반 판타지' 장르의 시금석을 확인해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야 <마법살인>을 굳이 권하지는 않겠습니다. 3권부터 본격적으로 재미있어진다고는 하는데, 하필 한국에서는 2권에서 정식 발매가 끊어졌네요. 이해는 가지만 아쉬운 일입니다.

아일랜드노벨153호 <천상천하 유아독존 북부대공> – 브릿G

'재미있습니다'라는 말은 모든 작가가 듣고 싶어하는 표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듣고 싶다 못해 당연히 들어야 하는 말이라고 여기기까지 하는 작가들도 있습니다. 물론 간혹 젠체하기 좋아하는 작가들은 “재미있다는 건 통속적이라는 소리고.” 하고 볼멘 소리 하기 바쁩니다만 그네들은 그네들 나름의 문법이 있으니 무시하면 됩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북부대공>의 불가사의한 점이 바로 재미있다는 점입니다. 작가님이 이 리뷰를 읽으신다면 기분 나쁘게 들릴 걸 압니다. '재미가 있으면 있는 거지, 그게 불가사의까지 할 일인가.' 아니, 근데 잠깐만 들어보십시오. 가끔은 '이상한데' 재밌는 게 늘 있단 말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감상을 쓰는 사람으로서의 입장이란 말입니다.

 

예. 확실히 작가의 '서술'은 서투르고 급한 면이 있습니다. 조선 왕국의 시조인 '이성계'를 모티브로 했음이 분명한 '북부대공'인 '이성수'는 '대고려제국'의 남방인 '황산벌'로 내려와 '아기장군'이 이끄는 왜구를 무찌르고 있습니다. 검색해 보니 실제로 있었던 '황산대첩'이 모티브군요.

그리고 여기에 드워프와 트롤, 오크, 다크엘프가 가세한다는 미묘하고 기이한 점은 일단 후술할 것이므로 당장은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왜냐면 이 점은 오히려 매력으로 다가오는 면이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작가가 '직접 말하기' 식으로 설명을 하든, '보여주기' 식으로 드러내든 독자에게 납득시켜야 할 부분은 적지 않습니다. 작품은 원고지 19매 분량의 굉장히 짧은 일화만을 다루고 있습니다만, 당장 독자에게 납득이 안 되는 부분이 너무나도 많은 것입니다.

'북부대공'이라고 말해지는 이성수는 충분히 소개되지도 않았는데 '대고려제국 남부'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왜적들도 소개가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왜적들이 트롤을 동원하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정신이 아득해지는 측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갑자기 왜구의 장군으로 등장하는 아기장수는 '아기장수 설화'의 맥락을 독자들이 떠올리지 못한다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싶을 것입니다. 겨우 떠올린다 하더라도 이것이 적절한 배치인가,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 말입니다.

 

아, 근데 재밌게 읽었습니다. 이건 비웃음이나 농담이 아닙니다. 19 페이지밖에 되지 않지만 이 작품에는 순수한 재미가 있습니다. 조금 당황스럽고 어이가 없는 측면이 있지만, 그런 만큼이나 독자로 하여금 함박웃음을 짓게 만드는 면이 분명히 있단 말입니다.

첫째로 작품 자체가 순진하기 때문입니다. 작가 본인이 자신이 좋아하는 요소를 꾹꾹 눌러담아서 쓴 티가 확실히 납니다. '여말선초'라는 분위기에 작가 본인도 흠뻑 취해 있는 느낌이 독자로 하여금 기분 좋게 만듭니다. 감정에는 미숙함이 드러나지만, 그렇기에 겉만 번드르르한 꾸밈이 없습니다.

둘째 또한 작품의 순진함인데, 이는 '여말선초'를 좋아하는 것과는 궤가 다릅니다. 언뜻 보면 '여말선초'라는 배경에 어울리지 않는 '북부대공'이라는 어휘나 드워프와 트롤, 다크엘프들 말이죠. 조금은 이 친구들이 어디서 왔는지 알 것 같습니다. <워해머>(40K와 AOS, 판타지를 가리지 않고, 셋 다요.)의 느낌이 조금 납니다. 굳이 안 어울릴지도 모르는 요소를 강경하게 대놓고 넣은 것도, 이 요소들을 좋아하시기 때문이겠죠.

이 두 가지 '순진함'이 시너지를 일으켜서, 굉장히 강한 펑크 록 같은 효과를 냅니다. 그 점에서 굉장히 '재미있었습니다.' 창작의 본연 같은 걸 볼 수 있다는 점에서요.

 

장편 개작에 대해서 문의주셨는데, 사실 어떤 말씀을 드리기는 껄끄럽습니다. 왜냐면 다른 사람의 항해에 괜히 한 소리 했다가 배가 가라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면에선 자신의 항해 방식은 자기 자신만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구요.

그럼에도 이 두 가지는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는, 일단 끝까지 써 보면 본인이 알게 되실 거라는 겁니다. 무엇을 알게 될 지, 그래서 어떻게 해야할 지조차 그건 완결을 내 본 사람만이 압니다. 그 점에서 어떤 형태가 되었든, 끝까지 써볼 것을 한번 말씀드려보고 싶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천천히 하셨으면 하는 겁니다. 어차피 써야 할 팔자에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원래 창작자라는 인간들이 한 작품만 만들고 죽지 않습니다. 작품의 완결이 인생의 완결이 아니니까요. 조금 호흡을 길게 잡고, 천천히 마라톤하듯 완주하셨으면 하는 약간의 바람이 있습니다.

작가님이 오래 꾸준히 창작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왜냐면 창작을 이토록 좋아하시는 분이니까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